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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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물고기는 강물의 유속(流速)이 아무리 빠르고 요동을 친다 해도, 바다에 폭풍이 일어 사납게 너울이 인다 해도 역류와 너울의 힘을 이용하여 가고 싶은 데로 거슬러 헤엄쳐 간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는 강물이든 바닷물이든 하얀 배를 드러내고 흐르는 데로 떠밀려 다니는 것을 본다.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본질 상 살아 있으면 세상 풍조가 용동치고 너울성 파도 같은 부패한 문화가 덮친다 해도 고고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더욱 강렬한 생명력으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사도행전 15장은 보여 주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좌절했던 열한 제자들을 회복시키시고 승천하시면서 하신 분부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신 말씀이었다. 이 명령의 다이나마이트는 성령강림에 폭발하여 마가의 집에 모였던 성도들의 회개와 성령충만으로 나타나서 예루살렘에 초대 교회를 형성하게 하였으며, 온 유다를 뛰어넘어 사마리아를 뚫고 페니키아, 키프로스(구브로), 안디옥으로 복음은 줄기차게 땅 끝까지 확산되어 갔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으로 첫 파송한 초대 선교사는 바나바였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행 11:22-24) 섬김이(Stward)이었다. 바나바는 안디옥 선교에 임함에 있어서 유대교 율법학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울(바울로 개명)과 동역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 시리아의 다소에 가서 함께 안디옥으로 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안디옥에 머물면서 이방인들에게 성경(구약)을 가르친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변화된 삶을 보게 된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한결 같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칭송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등지로 전파되어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지자 기쁨도 잠시 엄청난 격랑(激浪)과 폭풍(暴風)이 휘몰아쳤다. 이유는 ‘할례’ 문제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성도들이었기에, 유대인 성도가 이방인 성도와 식탁 교제를 한다는 것 자체가 천부당만부당 안 되는 일이며, 구원 받은 표지로 할례를 받아야만 하는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롬 1:17)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로서는 성립이 안 되며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적 성도 몇 사람이 안디옥 교회를 방문하여 행하였던 저간의 활동과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동기와 내용이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서 14절에는 이들보다 앞서 안디옥에 와 있던 베드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즉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베드로는 이방인 성도들과 더불어 친밀한 식탁 교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이방인들과 어울려 자유로이 식사를 한다는 것이 금지되고 있어 베드로는 그 책망이 두려워 밥을 먹다 말고 자리를 뜨고 말았는데,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적 미성숙한 처신은 다른 성도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바, 소아시아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바나바까지 베드로의 본을 따르려고 했던 모습이 이를 말해 준다.
만일 이방인들과의 식탁 교제가 부정된다면, 기독교 공동체의 통일성이라는 원리도 설 자리를 잃고 말 것이며, 자연히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본질적 진리도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되는 너무나 중차대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와중에 예루살렘에서 온 성도들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모아 놓고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15:1)고 강조함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냐”, “행위로서의 구원이냐” 하는 충돌은 초대 교회 전체를 신앙적 혼란이라는 폭풍의 격랑 속으로 몰아넣고 만 것이다.
그러나 논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인식한 안디옥 교회의 섬김이인 바나바는 바울 일행을 예루살렘에 있는 섬김이에게 보내어 처음으로 공론(公論)의 장(場)을 열어 이후에 이루어질 기독교 회의들의 전형을 제공하는 훌륭한 모임을 보여 주었다(행 15:2-5).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의 논점은 이방인 기독인이 할례를 비롯한 구약의 의식법(儀式法)들을 지켜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이는 곧바로 신앙의 본질과 직결되어 있음이 드러났던 것이다. 바나바와 바울이 세운 안디옥 교회는 성도들이 이방인들이라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 교리에 반하는 할례 문제로 혼란스러웠고,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회는 할례를 거부한다고 격렬하게 성토하였다. 이러한 여러 입장차를 보인 다양한 사람들이 공론의 장인 예루살렘에 모인 것이다. 이 모임이 자연스럽게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가 되었다. 즉 극우파 바리새인 출신의 기독인들이 이방인 기독인도 할례를 비롯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행 15:5; 고후 3:14)과 이에 강력히 저항하는 극좌파 율법 폐기론자들(롬 3:13; 약 2:14. 참조), 중도 우파로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중도 좌파로서 바나바와 바울이 각각의 공동체를 대표하여 자신들의 성경 해석과 경험을 가지고 토론 임하였던 당시 상황을 오늘 우리들의 상황에 대입해 본다. 마치 ‘급류타기’를 하듯 ‘많은 변론’(행 15:7)과 격렬한 토론 끝에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만한 결론에 도달했던 당시의 모습이야말로 평등한 ‘공론장’에서 ‘집단 지성’이 발휘되어 성공을 거둔 사례다 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먼저 사도행전 15장 6절에서 11절에 베드로는 할례를 강력히 주장하는 구 시대적 기독인들에게 10년 전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예로 들면서 바울과 동일한 구원관, 즉 인간의 구원은 선행 등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신득의’ 신앙이라는 성숙된 진리를 변증한다. 15장 12절은 안디옥에서 보여 주었던 베드로의 유대주의적 성숙되지 못했던 점과는 전혀 다른 신학적 성숙함을 보여준 확신에 찬 변증이 있은 다음,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실제로 행하신 사실들’을 공의회 앞에 증언함으로써 모두가 성령의 일하심을 부인 할 수 없는, 그야말로 기독교가 이론이나 사변(思辨)의 종교가 아니라 체험과 실상의 유일한 종교임을 확신시켜준다(요 16:7; 히 11:1, 참조). 15장 13절에서 21절, 본 공의회의 의장 역할을 맡은 야고보가 결론을 내린다. 그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내려질 야고보의 판단에 참석자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야고보는 먼저 구원은 할례나 기타 의식적(儀式的) 율법이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신학적 문제, 즉 베드로의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교리에 전적으로 동의하여 그의 옛 이름인 시므온이라 부르며 그의 소견을 요약하여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적극 확인해 준다. 둘째, 이방인 기독인과 유대인 기독인 간의 원만한 교제를 위해 몇 가지 현실 문제를 지켜줄 것을 이방인 기독인들에게 당부한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20절). 이는 신학적, 원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격의 없는 친밀하고 원만한 교제를 위해 이방인 기독인들에게 네 가지 금지 조항을 지켜 줄 것을 당부하는데 ,이는 ① 우상의 더러운 것 (고전 8장, 10:23-31), ② 음행 (근친상간, 축첩 등), ③ 목매어 죽인 것, ④ 피를 멀리하라, 등이었고 안디옥 교회는 이의 없이 이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는 갈등과 분열의 위기를 통합의 기회로 승화시킨 생산적 모임의 본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차별이 해소됨으로써 바나바와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활기를 얻게 되었으며, 둘째, 기존 유대교의 틀을 과감하게 탈피하게 됨으로써 신학적 통일성을 이룸과 동시에 특히 예루살렘 교회는 상대적으로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더욱 심한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성령의 뜻에 따라 채택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사항은 당시 유대인 기독인과 이방인 기독인 간의 첨예했던 갈등 상황을 기쁨과 감사로 승화시켜 교회의 본질인 예배와 선교 사역에 매진했던 역사를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 적용하여 좌우 이념으로 분열된 교회와 나라가 상호 장점들의 다양성을 조화롭게 연합하는 멋진 기독교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이요 대안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