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읽은 글의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말(馬)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뒷발길질을 잘 하겠네. 이 말은 순해서 뒷발길질을 하지 않겠네’하는 것을 공부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가 막히게 잘 맞추었는데, 한 번은 큰 말을 보고 조금 늦게 배운 사람이 “아, 요건 뒷발길질을 아주 잘 하겠네. 이 말은 아주 조심해야겠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먼저 배운 사람이 그 말의 뒤에 가서 엉덩이를 탁탁 쳤습니다. 그러니까 뒷발길질을 잘 하겠다고 말한 사람이 놀라서 말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아. 빨리 비켜. 큰일 나.”
그래도 먼저 배운 사람은 그 자리에 서서 말의 엉덩이를 계속 때리는데, 말이 발길질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다. 왜 발길질을 하지 않지? 생긴 것은 뒷발길질을 잘하게 생겼는데.”
그때 먼저 배운 사람이 말했습니다.
“자네 판단이 맞아. 이 말은 뒷발질을 잘하게 생긴 말이야. 그러나 자네는 앞 다리를 보지 않았어. 앞 다리를 보게. 앞 다리의 무릎이 부어 있지? 지금 이 말은 앞 다리가 아파서 발길질을 할 수 없네. 말이 뒷발길질을 할 때는 힘의 중심이 앞 다리에 있다는 것을 알지? 앞발에 힘을 주고 뒷다리로 차는데 앞발에 힘을 줄 수 없으니 발길질을 할 수가 없다네. 자네가 본 것은 뒷다리뿐이야. 나는 앞 다리도 보았지.” 이것이 분별력의 차이입니다.
사람을 보아도 겉만 보면 안 됩니다. 속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사람의 앞면만 보면 안 됩니다. 뒷면도 보아야 됩니다.
요압 장군이 “형님, 안녕하세요?”하면서 형을 칼로 죽였습니다. 악수하는 손만 보면 안 됩니다. 칼을 잡은 손을 보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호남기독신문 애독자 여러분, 매사에 우리는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매 순간 순간 생각 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영적분별력으로 세상의 파고에 휩싸이지 않는 한 주가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