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는 53년간의 마상 설교자로서의 사역을 단 한가지 일에 집중하였다. 그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모임(Aldersgate St. Society)을 향하면서 단 한 가지(one thing needful)가 필요하다고 그의 일기에 쓰고 있다. 그것은 모라비안(Moravian)의 중심적인 가르침인 ‘산 신앙’(aliving faith)이었다. 그리고 웨슬리는 53년 후 자신의 일기 마지막 날에 자기는 그날 “단 한 가지 필요한 것”(one thing needful)을 설교하였으니 모두 바른 선택을 했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
웨슬리는 영국교회 자체에 대하여 한 번도 비판한 일이 없지만 그러나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죽은 신앙’, 즉 하나님을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그의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죽은 신앙’을 문제 삼았다. 그리하여 그는 7년간의 옥스퍼드대학교의 신성클럽(Holy Club) 운동과 2년 4개월간의 미국 선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I was never converted to God”, 즉 자기가 하나님을 심각하게 믿지 못한 것을 깊이 회개하였다.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산 신앙’을 가졌는지 ‘주 예수’를 내 구주로 받아들여 그가 모든 죄에서 나를 구원하셨음을 믿는 ‘산 신앙’(a living faith)을 가졌는지에 관한 구원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처럼 웨슬리는 구원의 심각성과 산 신앙의 문제를 그의 ‘교회안의 작은 교회’안에서 철저히 점검하고 훈련하였으며 나아가 실현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교회의 부흥은 숫자의증가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복음이 선명하게 선포되고, 가르치면 생명이 회복된다. 성경으로 돌아가 다시금 사도행전적인 교회를 회복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가정교회로서 ‘작은 교회’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하는데 교회의 바른 의미는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교회는 건물과 종탑이 없었다. 당시에는 지하에 있었고, 가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원형은 가정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마가의 다락방,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집, 에베소 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의 집, 고린도 교회는 가이오의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초대교회는 가정이 교회였다. ‘작은 교회’안에서 교회의 본질회복을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오늘날 한국교회는“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라”, “성화운동을 하자”, “한국교회는 이제 이대로 안 된다”는 소리를 듣는데 이는 웨슬리 당시의 영국사회와 교회가 직면했던 문제와 흡사하다.
기독교 선교 2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적으로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경이로운 부흥과 성장을 경험한 한국교회는 이제 새로운 평가에 직면해있다. 그것은 곧 교회의 구조가 선교 지향적이라기 보다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 급급하다. 이런 관점에서 웨슬리의 ‘교회 안의 작은 교회’에 나타난 선교운동 연구는 한국교회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것이다.
존 웨슬리의 신학은 복음을 효과 있게 선포하여 가능한 한 많은 영혼을 구원하려는 목적을 위해 가르친 선교학이라 할 것이다. 신학의 목표가 ‘복음’을 전해서 “믿고 구원 얻게 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면, 영국사회와 교회의 타락에 반작용으로 발생한 청교도적인 엄격한 가정교육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철저한 신앙생활은, 대학시절 규칙쟁이(Methodist)라는 조롱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터전 위에서 얻은 경건주의적인 중생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영국에 큰 각성 운동과 사회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존 웨슬리의 주요 신학적인 관심사는 다른 주요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론이었다. 웨슬리의 관심사는 죄인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어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고 그로 인하여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 문제는 자연히 절박한 문제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웨슬리의 구원론 문제는 그의 교회의 이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만 한다. 웨슬리가 보는 교회의 존재 목적과 의의가 바로 죄인인 인간의 구원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죄인인 인간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진 웨슬리의 신앙운동은 교회를 근거로 선교하고 사역을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웨슬리의 교회관을 살펴보면, 웨슬리는 그의 사역의 초기부터 교회에 대한 획기적이며 개혁적인 계획을 가지고 출발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16세기의 종교개혁자인 요한 칼빈이 자신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에 맞추어 세밀하게 개혁교회를 추진한 것과는 달리 웨슬리의 신학과 교회 이해는 메소디스트 운동에서 그때그때마다 나타나는 실제적인 경험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웨슬리는 그가 개인적으로 교회사와 교회론의 연구를 통하여 자신의 종교개혁에는 교회관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