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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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교회를 세우고 이젠 동료 의사 오웬도 있고 가족도 함께하는 첫 겨울을 나며 2년차 목포 사역을 맞이한 새해 벽두에, 유진 벨은 또 하나의 경사를 맞았다. 둘째이며 첫 딸을 낳은 것이다. 샬롯(Linton, Charlotte Witherspoon Bell, 인사례, 1899~1974), 그녀는 1899년 1월 6일 목포에서 태어났다. 목포에서 태어난 최초의 외국인 아이다.
샬롯은 부모뿐만 아니라 목포 사람들의 상당한 관심과 사랑 속에 태어나고 자랐지만, 이내 그는 큰 슬픔의 벽에 갇혔다.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고 의식할 수도 없는 어린 나이 만 2살을 갓 넘긴 즈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로티 위더스픈이 어린 아들 헨리와 딸 로티를 남기고 갑작스런 심장병으로 인해 하늘나라로 가버린 것이다. 1901년의 일이다.
갑자기 어머니를 잃은 샬롯은 오빠 헨리와 함께 아빠의 손에 이끌려 미국으로 건너갔다. 켄터키 부모의 고향에서 그곳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의해 성장을 하였다. 샬롯 벨은 우스터 대학을 거쳐 아그네스스콧 대학을 나왔다. 버지니아에 있는 메리볼드윈 대학과 함께 미남장로교에서 여성 지도자 양성을 위해 세운 아그네스 스콧(Agnes Scott College)은 조지아주 애틀란타 근처 디케이터(Decatur)에 위치하고 있다. 전주의 랭킨과 몽고메리 크레인, 광주의 리틀페이지 카딩턴, 순천의 애니 프레스톤, 목포의 프레스톤 커밍, 그리고 간호사 허우선과 라두리 등의 여성 선교사들이 같은 동문들이다.
샬롯 벨은 학업을 마치고 자신도 부모에 이어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아버지의 모 교회였던 셸비빌 장로교회와 루이빌 노회의 파송으로 1922년 봄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리고 그해 6월 일본에 도착하였고 고베에서 이미 한국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청년 린튼과 결혼, 조선으로 왔다. 그녀의 나이 23살이었다. 샬롯은 남편의 성을 따라 살롯 린튼(인사례)이 되었고, 윌리엄 린튼과 함께 부모에 이어 2대째 선교사역을 조선에서 펼쳐 갔다.
샬롯의 남편이며 유진 벨의 사위가 된 린튼(Linton, William Alderman, 인돈, 1891~1960)은 1891년 조지아주 출생으로 조지아공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1912년 21살, 상당히 이른 나이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역대 미남장로교 선교사 가운데 최연소 연령으로 파송되었다. 은퇴할 때까지 48년간을 군산과 전주, 대전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그는 안식년 기간을 활용하여 1930년엔 콜롬비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도 받았다. 한국 선교지에서 목회와 함께 군산 영명학교,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학교의 기틀을 잘 조성하였으며, 1956년엔 대전에 한남대학교를 설립하였다. 미남장로교 조선선교부가 오래도록 기도하며 추구해왔던 조선에서의 기독교 대학 사역을 연 것이다.
인돈 선교사는 1960년 건강 악화로 미국에 돌아갔으며 하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묘는 노스캐롤라이나 블랙마운틴 마운틴뷰메모리얼파크에 있다. 대전 한남대학교 내에는 설립자인 그가 살았던 사택이 보존되어 있고, ‘인돈학술원’이라 하여 후배들이 그의 사역을 이어 미남장로교 사료 수집과 연구활동을 펼치고 있다.
린튼과 샬롯 부부 사이에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셋째와 넷째 두 아들이 부모를 따라 조선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외할아버지 유진 벨에 이어서는 3대째인 셈인다.
셋째 휴 린튼(Linton, Hugh MacIntyre, 인휴, 1926~1984)은 군산에서 태어났고, 순천을 중심으로 교회 개척과 목회 사역에 헌신하였다. 1970년 안기창 목사 등 한국인 목회자들과 함께 등대선교회를 조직하여 순천을 중심으로 한 전남 동부지역 일대에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고 사역하였다. 광양, 보성, 고흥 등 농어촌 마을 곳곳에 수백여 교회를 세웠고, 목회자 양성에 정성을 다했다.
인휴 선교사는 ‘검정 고무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처럼 사적으로는 참 검소한 사람이었다. 한국인과 똑같이 고무신을 신고 고구마로 요기를 삼으며 전라도 황토밭 시골길을 동료들과 걸어 다니며 전도하고 교회 세우는 일에 열심 내었다. 검소와 절제된 삶이되 교회를 세우고 한국인 목사후보생 교육과 장학 지원에는 아낌없이 선교비를 내었다.
안타깝게도 1984년 교통사고를 당해 갑작스레 사망하고 말았다. 만약 광주까지 후송 도중에라도 응급 처치가 될 수 있었다면 그래도 목숨은 살릴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에, 그의 아들은 봉고차를 개조하여 한국식 응급차 앰뷸런스를 만들었던 게 지금의 구급차가 탄생하게 된 계기이다.
휴 린튼의 아내 로이스 린튼(Linton, Lois Elizabeth Flowers, 인애자, 1927~ ) 선교사는 순천 결핵원을 열어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헌신하였다. 휴 린튼은 순천 결핵 요양원 언덕에 누워 있으며, 로이스 린튼 여사는 2023년 현재 96세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랙 마운틴에서 지내며,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넷째 드와이트 린튼(Linton, Thomas Dwight, 인도아, 1927~2010)은 전주에서 출생하였다. 휘튼 대학과 콜롬비아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53년 내한 선교사로 와서 광주에서 전도 사역과 기독병원 원목 사역, 그리고 목포 정명학교 교육 사역 등을 했다. 그의 아내 앤 린튼(Linton, Marjory Ann Potter, 인마서, 1925~2014) 선교사는 남편을 도와 광주의 전도사역과 여성 사역을 감당했다. 인도아 선교사는 2010년 사망하였고 아내 인마서 선교사는 2014년 사망하였으며, 두 부부의 묘는 블랙 마운틴에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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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의 딸 샬롯과 사위 린튼 선교사 |
목포 성경고등학교장, 샬롯 린튼
1960년 8월 남편 인돈을 먼저 하늘로 보내고 대전에 홀로 남은 샬롯. 자녀들 가운데서도 두 자녀 부부가 자신에 이어 그리고 선친에 이어 3대째 한국 선교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사례는 이젠 목포를 향했다. 목포가 자신에게 무슨 마음의 빚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버림과 소외의 동병상련이라도 늘 있었던 걸까?
남편을 잃고 다시 홀로 된 샬롯은 낙망과 슬픔을 딛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기 어머니를 빼앗아 간(?) 목포를 찾아, 생명과 구원의 사역자로 거듭 헌신한 것이다. 이미 자신도 환갑을 넘긴 고령의 나이였다. 1961~1964년 목포 고등성경학교 교장으로 60대 노년의 마지막 생애를 불태웠다.
1963년 12월, 그녀는 편지에서 자신이 오랜 전부터 뇌졸중을 앓고 있으며, 몸이 회복되거나 치료되긴 어려워 보이며, 아마도 다음 해 미국으로 돌아가면 이제 다시 한국으로 오지 못할 것 같다고 밝힌다.
실제 그녀는 1964년 은퇴하여 부모의 고향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샬롯 린튼, 목포가 낳은 딸은 목포와 호남, 한국에서 자신의 청춘 40여년을 헌신하고 수고하며 아름다운 일생을 남겼다.
인사례, 선교사 2세로 나고 살아가는 개인의 일생이 참으로 힘겨웠지만, 그에게 미친 하늘의 은혜와 손길은 그녀의 삶을 붙들어 하나님 나라와 미션에 온전한 헌신과 열심 담았다. 그녀의 불꽃같은 인생과 선교적 삶은 아버지 유진 벨에 이어진 것이며 자식들에게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져 벨 가문 3대가 호남 선교 세습에 충성하였으니 참으로 멋지고 복된 가정 아니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