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3월 1일은 3.1운동 104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모든 일을 민족과 함께 했습니다. 1907년에 윤치호가 찬미가를 발행하였습니다. 전체 15장에 불과했지만 당시에는 큰 사건입니다. 그곳에 찬송가도 넣었지만 특이한 것은 그 찬송가 속에 애국가와 황제송을 삽입한 것입니다. 찬송가에 애국가를 삽입한 것은 한국 교회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일본이 이 나라를 무자비하게 지배하니까 우리 민족이 기댈 곳은 기독교 밖에 없다고 믿어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의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의 지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눌림 받았습니다. 힘도 없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때 믿을 것은 오직 기독교뿐이었습니다. 그때 가장 많이 부른 찬송이 “예수 예수 내 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쉬 떠나지 마시고 부형같이 되소서”입니다. 그 무렵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베어드 선교사가 집회에서 한국민족의 아픔과 설움과 탄압을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성령이 불같이 떨어져 교회를 휩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탄신경축 예배가 평양 대동강 건너편 사각 대청에서 열렸는데 300여명이 모여 기도를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때 기독교인이 300명이면 오늘 3만 명과 비슷한 숫자 입니다. 그때 교인들이 성령이 임하심으로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독립가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전국의 교세는 6개 교파에서 파송한 90명 선교사가 있었고 전국에 2천명의 기독교인이 있었고 50여 교회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국민생활을 이끄는 세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때 당시 황제탄신축하 행사는 고관대작 들이 개최하여야 하는데 일제가 두려워 못하던 것을 기독교가 나서서 더 크게 행사를 치렀는데, 빈부귀천 모두가 참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 교회는 애국심으로 체질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바탕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때 태극기를 가장 많이 게양한 곳이 교회였습니다. 고종이 평양지방을 순시할 때 교회가 태극기를 높이 게양하였고 고종을 위해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런 열기가 마침내 교회로 하여금 무력까지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천주교인 안중근은 조선의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암살하였습니다.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본 안중근은 순간 무릎을 꿇고 “천주님, 폭살자는 죽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아픔과 핍박 때문에 한국 교회가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구국기도회라는 것이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가장 많이 기도한 때는 6·25전쟁 때였습니다. ‘지금 한국이 살 길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 밖에 없다’고 외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손을 들고 기도하게 하였고 그것이 한국 교회로 하여금 손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한국을 당시는 조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전 세계에 한국 상황을 타전하기 위해서 당시 조선을 영문으로 쓰고 나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조선을 영문으로 써놓으니 ‘초슨(Chosen)’이 되었습니다. 그 말은 ‘선택받음’이라는 말입니다. 선택이라는 ‘초슨’의 어원은 한국말 조선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나라입니다.
오늘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의 기적적인 성장의 원인을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 성경을 구원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뜨겁게 기도하는 것, 세 번째는 믿으면 반드시 전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우리 대한민국을 선택하셨습니다. 1903년에 원산에서 선교사들이 시작한 집회가 여러 달 동안 계속되었는데 마침내 그 열기가 평양 장대현교회를 시작으로 그 유명한 새벽기도회로 이어졌는데 그때 일본경찰들이 와서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그 기도소리를 듣기에도 눈물이 났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 있게 기도했으면 일본경찰까지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우리 민족은 한이 많은 민족입니다. 서러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그냥 기도하지 않고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런 훈련으로 오늘까지 한국 교회는 뜨겁게 기도하는 교회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형성되던 시기는 일제의 압박과 침략기였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민족교회로 출발하였습니다. 당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조직은 교회뿐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한국 교회는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면서 이 어려운 난국과 역사의 굴곡을 헤쳐 나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 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전통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 환란을 통해서 복음을 더 깊고 더 넓게 확장시키셨습니다.
현재 한국은 독재에 대한 항거는 없으나 국론은 사분오열되어 서로 물고 뜯고 싸우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혼란과 타락의 길로 치닫고 있으며, 국민들이 존경할만한 민족의 지도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는 민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종교이고, 말씀 중심의 신앙공동체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본받아 인간적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만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민족의 희망임을 믿고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의 술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지위를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핍박을 감수하고 노력했습니다. 3.1운동 당시 교회는 민족을 위해서라면 종교도, 이념도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사회참여에 앞장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기풍, 주기철, 손양원 목사와 더불어 독립 운동가들인 안창호, 이승훈, 이승만, 이상재, 조만식, 서재필, 윤치호 등은 모두 기독교가 키워낸 인물들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신민회에 주도적 역할도 감당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느헤미야 같은 인물들, 3.1운동에 주도적 참여 했던 기독독립운동가들 같은 지도자를 키워야 합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커지고 유명해지는데 만 관심이 많습니다. 사회는 이런 물량주의적 자랑보다 정직과 진실성을 더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돈, 명예, 권력보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 천국의 윤리와 삶의 가치를 새롭게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절대 신앙하는 믿음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민족의 해방과 구원 그리고 삶의 모든 게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임을 깨닫고, 오늘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응답을 구해야 합니다. 말씀이 없는 사회참여나 애국심은 삼일운동의 정신과 거리가 멉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인 이갑성 옹의 증언에 의하면 삼일운동은 원래 3월 2일 날 거사하려 했다며 “그러나 2일이 주일이기에 기독교 지도자들의 반대로 1일 날 거사가 잡혔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이런 주일을 하나님의 날로 철저히 구별하려는 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말씀위에 거사를 행했기에, 3.1운동이 민족 전체 그리고 세계만방에 우리 독립의 의지를 알릴 수 있었습니다. 말씀에 바로 서지 못하면 교회는 정치적 사건에 이용만 당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독일 통일 당시 동독의 민주혁명은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됐고, 성공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젊은이들이 통일 후 교회를 떠나고, 다시 텅 빈 공간이 돼 버렸습니다. 교회가 말씀에 굳건히 서서 민족과 운명을 함께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새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민족이 교회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교회는 민족을 사랑하고 바르게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을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