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
기독교의 복음(Kerigma)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낮아지심,humiliation)와 부활(높아지심,exaltation)로 구성되어 있다. 십자가(자기 비하,卑下)는 부활로 완성되고, 부활(승귀,昇貴)은 십자가를 전제로 한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고 하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의 의(義)가 회복되었음을 온 천지에 알리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우리로 하여금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고 고백하게 하신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십자가에 대한 답변임을 말해 준다. 예수님은 인간 한계로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참혹한 극한 상황의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마 27:46b)라는 절규의 질문을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던지셨다.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부활(復活)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으셨고,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확증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분이 진정 누구시며, 무슨 일을 이루셨는지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礎石)이요, 그래서 기독교를 가리켜 <부활의 종교>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부활’이란 무엇인가? ‘부활’은 한자로 “다시 부, 復”(회복할 ‘복’으로 주로 씀)자와, “살 활, 活”자의 합성어로, 그 뜻은 “다시 살아나다”, 곧 헬라어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 “일어나다”, “깨어나다” 이다.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마무리하시면서 메시아로서 불원간 당할 고난을 예고하시는 가운데 죽음과 부활을 네 차례나 언급하셨다(마 16:21, 17:22-23, 20:17-19, 26:1-5). 그리고 아담의 후손인 많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저주와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충족시켜 주셨고, 나아가서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비밀(뮈스테리온, μυστήριον )을 <부활>로서 확증시켜 주셨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기록 중 예수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오직 성경뿐 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을 떠난 다른 자료를 통하여 검증할 수 없다. 이 성경만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성(歷史的 事實性) 위에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부활’에 관한 첫 자료가 되는 성경 고린도전서 15장 4절 이하에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사도신경」을 통해 “장사된지 사흘만에...”라고 고백한다. 여기 ‘사흘’은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가? 성경은 이 부활의 시간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顯現)의 시간으로, 그리고 요한복음 20장 1절에서는 “안식 후 첫 날” 빈 무덤이 발견된 날로 기록하고 있다. 두 본문 모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부터 시작하여 삼 일째 되는 일요일로 계산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사흘” 앞에 “성경대로”라고 수식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이 구약에 예언되었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주전 710년 전,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 호세아는 6장 2절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예언했던 바, 유대교 랍비들은 이를 죽은 자들의 부활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이해하였다. 호세아에 앞섰던 선지자 요나가 바다에 던져져서 삼 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욘 1:17)는 기록을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주님 자신의 부활의 유형과 연결시켜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죽음이 삼켜버린 요나의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처럼 예수님은 음부의 권세에 사흘 동안 사로잡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던 대로 십자가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役事)를 이루시고(요 19:30), 돌무덤에 묻히셨다가(요 19:38-42) 사흘 째 되던 안식 후 첫 날(요 20:1), 인간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몸으로 부활하셨다(마 28:1-10; 막 16:1-18; 눅 24:2-49; 요 20장, 21장).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간과 공간 가운데 실제로 발생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변증한 그대로 부활 신앙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 신앙임에도 당시의 불 신앙인들은 물론 오늘날의 실증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현대인들에게까지 계몽주의(啓蒙主義, illuminism) 이래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동정녀 탄생론은 가장 많이 공격 받아온 교리 중 하나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요구에 충족할 만한 변증적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판넨베르크(W. Pannenberg)의 주장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기록해 놓은 자료는 오직 성경이기 때문이다. “증인은 순교자이다”(the witness is the martyr)라는 말이 있듯이 교회의 증인은 자신이 목격한 부활 사건과 그 의미를 증언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았는데 그 증거는 첫째, ‘빈 무덤’이고, 둘째, 사도들을 비롯한 허다한 목격자들의 다향하면서도 사실에 입각한 여러 ‘증언’들에 근거한 그들의 올곧은 순교적 삶에서 입증하였다.
그 첫째는, 부활의 전제되는 ‘빈 무덤’이 증명하는 바, 예수님의 죽으심의 확실성이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을 15장 33절에서 41절과 마태복음 27장 45절에서 56절, 누가복음 23장 44절에서 49절, 그리고 요한복음 19장 28절에서 30절의 예수님의 죽으심을 사실적으로 일관되게 보도하고 있으며, 드디어 운명하신 후, 무덤에 장사되는 장면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막 15:42-47; 마 27;57-66; 눅 23;50-56; 요 19;31-42). 이들 기록 중 두 강도와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양 손목과 양 발에 못을 박고 세웠다는 기록(요 19:18)과 모진 고통 가운데 “다 이루었다”하시고 영혼이 떠나가신 장면과(30절), 무자비한 로마군의 확인 사살하듯 창에 예수님 시체의 옆구리가 찔려 피와 물이 쏟아지는 것을 목격한(34절) 그대로 리포트한 요한의 필치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진정성을 돋보이게 하는 바,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35절)고 확증시켜 준다. 이 때가 안식일의 준비일(금요일)인데 산헤드린공의회 회원이며 예수님의 제자가 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의 허락을 받고 예수님의 시체를 수습하여 본래 자신의 것인 돌무덤을 선뜻 제공하여 장례를 치룬다(요 19:38-42; 마 27:57-61; 막 15:42-47; 눅 23:50-56).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살아 생전 당신이 죽으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아신 말씀을 기억하여 혹시나 예수꾼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굴해 갈까봐 빌라도 총독에게 로마군으로 하여금 사흘 동안 특별 경비를 맡도록 요청한다. 이에 빌라도 역시 불안하여 이를 허락하였고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다”(마 28:62-66)라는 사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례의 확실한 근거가 된다.
그 둘째는, 무덤을 깨치고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허다한 목격자들에 따른 증언의 확실성이다. 안식 후 첫 날(일요일),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등 몇몇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을 갔더니(막 16:1-2; 마 28:1; 눅 24:1-2; 요 20:1), 무덤의 커다란 돌문이 굴러 열어져 있고(막 16:4; 눅 24:2; 요 20:1a), 무덤은 빈 무덤이다. 경비병들은 이에 무서워 떨며 사색이 되어있고(마 28:4), 여인들 역시 겁에 질려 있는 상황에 흰 옷 입은 천사가 이들을 향하여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은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기 않고 그가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5-6)고 말한다. 그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듯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처음 목격자요 증인들이 당시 유대 사회 문화 가운데 너무나도 하찮은 무가치한 존재로 여겨졌던 ➀여인들이었지만 경이스러운 주님의 부활 사실과 그와 함께 전달되는 기쁜 소식의 메신저였음을 사복음서는 일제히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서는 ➁시몬 베드로에게(눅 24:34; 고전 15:5), ③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눅 24:13-35)와 ➃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에(눅 24:36-40; 요 20:19-23; 고전 15:5)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당신의 부활을 확증시키시며, 반신반의하는 목격자들의 의구심을 제거하고자 손, 발과 옆구리의 상한 상처들을 보이시고(요 20:20; 눅 24:38-41)나서 제자들이 드린 구운 생선을 받아 드시기까지 하시며(눅 24:42-43), 이어서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하시고(요 20:22), 제자들이 장차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신다(요 20:23). 그 일이 있고난 여드레 후 주일에 ➄도마를 포함한 열 한 제자들에게 다시 오셔서 특히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에게 손과 발을 만져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 하시며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도전하신다(요 20:24-29). 그리고 ➅부활하신 예수님은 약속하셨던 대로 갈릴리 호수에 가셔서(마 28:7) 본 직업으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에게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요 21:1-23), ➆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 약속했던(마 26:32) 갈릴리의 한 산에 오르시어 열 한 제자들에게 세계 선교 대명령(Great Commision, 마 28:18-20; 행 1:8)을 내리신다. 또한 ➇오백 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시고(고전 15:6), ➈주님의 동생 야고보에게(고전 15:7)와, ➉그리고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 산에 가셔서 그들을 축복하시고 계시다가 승천하셨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눅 24:50-5a; 행 1:3-8). 누가는 사도행전 1장 3절에서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부활체의 현현을 목격한 이들이 실제로 부활의 증인(martyr, 순교자)으로 살았다는 것이고, 또 자신들을 부활의 증인(witness, 복음 전도자)된 자부심을 갖고 살다가 목숨을 바쳤기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으며, 또 이 복음이 2천 년 역사 한가운데 땅끝까지 도도히 전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시작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 15:1-2).
이것이 구원의 복음이다. 바울은 헛되이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여기 헛되이 믿지 않는다”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고 부연 설명함으로써 십자가와 부활을 복음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신학적 중요성을 재확인시켜 준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느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라는 바울의 화두에 사용한 표현에서 “먼저”와 “성경대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 하면 이 단어가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아 십자가와 빈 무덤의 중요성 및 복음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부활의 신학적 의의와 유익을 세 가지 차원으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셔서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얻으신 의(義)에 우리가 참여하는 칭의(稱義,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의 근거를 발견한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4-25). 즉 부활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우리에게 더 이상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죽음의 세력이 미치지 못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새 생명으로 ‘중생’하게 하셨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되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엄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벧전 1:3-4). 우리의 날마다의 삶을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삶’인 바, 중생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우리에게 심겨지는 날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궁극적 승리의 개가(凱歌)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앎이라”(고전 15:57-58). 우리는 죄악과 죽음의 현실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거침없이 도전하는 부활 신앙을 갖게하신 주님께 깊이 감사하며 담대하게 환희에 찬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기에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니”라고 고백하는 영광을 누린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