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열 목사 (본지주필, 기독교한국신문논설위원 군남반석교회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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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104주년을 맞이하는 3.1운동은 우리 기독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전국 9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 그 후 일 년 가량 우리나라와 만주 연해주 등 해외로 확산된 것이다.
일제가 1910년 8월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여 식민통치를 할 때 민족사에 새로운 전기가 3.1운동이다.
한성과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함께 하고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그 해 4월 11일 창건되어서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3.1 운동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정을 국가이상으로 제시했다.
바로 이 이념은 임시정부헌법에 정착되었다. 또한 이전에는 민족의 운동사에 평민 지도자가 거의 없었는데 3.1 운동을 계기로 양반과 귀족 지도자 대신 평민지도자가 민족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이 때 기독교인들은 어느 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또한 다른 종교나 집단에 비해 현저히 우세하게 참여하였다. 즉 한민족의 구성원으로서 이 운동에 참여한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기독교 신앙고백과 함께 참여한 것이다.
기독교 대표 16인의 서명은 다른 지도자들과 같이 감옥에 가는 것은 물론 죽음도 결심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형편을 보면 유식한 사람들이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했고 독립시기 상조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때 3.1 운동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자신이 죽어야만 독립열매를 거둘 수 있다며, 민족 속에 독립을 심으러 간다고 했다.
공소공판에서도 이승훈은 ‘그렇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니 어느 누가 조국의 흥왕과 민족의 번영을 바라지 아니하며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않겠느냐?’ 라고 했고 이갑성은 ‘이 일은 일시적인 감정에서 난 것이 아니고 근본적인 독립사상에서 난 것이다’라고 했다.
최성모 또한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참가했다’라고 말했고 최흥식은 물을 것도 없다. 사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인가 참다가 일제의 압박과 참혹한 통치를 보고 하나님의 섭리는 독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 그리고 48인 가운데 24인이 기독교인이었다.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가 있으면 거의 기독교인들이 중심에 있었다.
어쩌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희망이 없는 이 민족에게 신앙이 정의와 자유와 평화에 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투쟁이자 신앙의 고백이었다.
3.1 절엔 절대 잊지 못할 이름 유관순이 있다.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처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17세 3.1운동에서 일제의 만행을 견디며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는 말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코와 귀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은 참을 수 있지만 내 나라를 잃은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위해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1920년 3월 1일 천안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잡혔다. 그의 부모는 살해되고, 투옥 중 재판장은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일본의 신민으로 살 것을 맹세하느냐? 질문할 때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
유관순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모든 학생에게 나무젓가락을 세워보라 하는데 아무도 세울 수 없자 유관순이 나무젓가락들을 모아서 묶어서 세우면서 뭉치면 할 수 있다고 했다.
2023년 3.1절을 맞아서 우리는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기독교인의 나라사랑을 다시 한 번 3.1정신을 통해서 일깨워야한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주신 나라다. 눈물과 피를 바치고 목숨을 바친 순국열사와 순교자들을 잊지 말고 3.1 운동 그때의 기독교 신앙관으로 이 민족을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