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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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유진 벨은 딸 샬롯을 얻는 기쁨과 함께 오웬을 통해 목포 진료소도 개설하였다. 오웬의 진료소는 목포는 물론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었다. 종래의 전통 한의사의 처방과 한약으로만 치료받던 환자들은, 양의를 전공한 서양 의사로부터 진료와 양약을 통해, 보다 좋은 의료 도움을 받았다. 오웬 진료소는 늘 환자들로 붐볐으며, 매일 아침 기도회로 시작하였다.
오웬은 환자의 육체적 질병을 고칠 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를 동시에 펼쳐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도 성심을 다하였다. 그에게 찾아온 환자들은 늘 많아서 항상 대기표를 받아 쥐고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나무로 된 순서표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써 있었다. 그리고 진료 후 약을 봉투에 담아 줬는데, 그 봉투에는 성경 구절을 써 놓았고 환자가 다음에 다시 병원을 찾아 올 때는 그 봉투를 가져 오게 하였다. 그러니 글씨를 아는 사람은 아는 대로, 모르는 사람은 물어서라도 관심과 주의를 끌며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에 대해 떠 올리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궁금증을 가졌을 것이다.
오웬은 의사이면서 동시에 가장 왕성한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많은 환자를 진료하느라 늘 지치고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틈만 나면 밖에 나가 전도하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내고 열심을 쏟았다. 그 일에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참으로 소모되는 기름처럼 헌신했다. 바닷가에 나가 선원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거나, 때론 배를 타고 멀리 이 섬 저 섬을 돌며 생명의 빛을 나눠주기도 했다.
비록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최근 이곳에서 문을 연 진료소는 이미 한국의 일부 고난 받는 자들을 섬기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많은 생명을 하나님께로 데려가는 더 큰 축복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진찰을 기다리는 환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성경 본문이 게시되며, 낱장으로 된 인쇄물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제공된다.
종종 글을 읽는 사람은 큰 소리로 읽을 것이며, 그러면 메시지는 귀와 눈 모든 것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환자가 진료소에 들어가면 그에게 나무로 된 표가 주어지고, 그 각각의 표에서 그 환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글귀를 읽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지난 주일 오후에는 선원을 대상으로 전도하였다. 그들은 기꺼이 전도지를 받았다. 몇 사람은 따라와서 전도책자를 요구했다. 우리는 가져간 전도지를 모두 사용하였다. 우리는 빈손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뿌려진 씨앗을 돌보시고, 그의 선한 뜻에 따라 날로 믿는 자들이 증가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오웬, 미셔너리 1899년 10월).
유진 벨 선교사가 이끄는 목포 교회는 동역자 오웬의 진료소 운영과 전도에 힘입어 차츰 성도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오웬이 처음 목포에 왔을 때만 해도 불과 10명 남짓이었으나, 1899년 4월에는 20여명으로 늘었고 10월에는 주일날 아침저녁 예배에 평균 30여명이 출석하였다. 유진 벨의 헌신적 인도 못지않게 실제로는 오웬의 의료 선교와 열심 전도가 큰 밑거름이 되었다.
9월에만 해도 세례 신청자가 4명이나 있을 정도로 불과 1년 반 만에 목포 교회는 성장하고 자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무렵 나주에 있던 변창연 조사는 나주에서의 전도 활동을 접고 목포 유진 벨 곁으로 와서 목포 교회의 일에 조력하였다. 1897년 봄부터 변창연은 아내와 함께 선교사가 없는 가운데 나주에서 독자적으로 전도하며 교회 공동체를 만들려 했지만, 아마 2년이 다 되도록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서 차라리 목포에 합류하기로 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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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당시의 목포 진료소와 환자들 |
여성 사역자 스트래퍼가 오다
1899년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일군이 목포에 왔다. 유진 벨과 오웬에 이어 목포 최초 여성 선교사 스트래퍼가 12월에 도착하였다.
스트래퍼(Straeffer, Frederica Elizabeth, 1868~?. 서여사)는 1868년 6월 24일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출생하였다. 1899년 선교사로 지명되어 그해 연말 12월 27일에 목포에 도착하였다. 31살의 독신 사역자였다. 그녀의 목포 선교 합류는 유진 벨에게 참으로 기쁨과 용기를 더하였다. 의사 오웬이 왔을 때도 그랬지만 스트래퍼 여성 사역자가 오게 되어 이제는 여성과 아이들에 대해 더 적극적인 선교가 이뤄질 수 있게 되어서이다.
당시만 해도 남녀칠세부동석 문화가 강했던 조선인지라 유진 벨도 그랬고 전도 열정이 충만한 오웬도 여성에게 접근은 어려웠다. 여성으로 벨의 아내 로티가 있었지만 그녀는 만삭이거나 출산으로 인해 건강과 자녀 양육에 신경써야 했으므로 본격적으로 여성들을 상대하며 바깥 전도를 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즈음에 스트래퍼 선교사가 목포에 와서 그녀를 통해 목포의 여성과 아이들 사역, 주일학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실로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6).” 나는 내가 목포에 도착한 지 벌써 8개월 지났다는 사실이 거의 실감이 나질 않는다. 그 동안 나는 한 낯선 나라에 낯선 사람들 가운데서 한 낯선 사람으로 지내왔다.
목포에서는 복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가 특별히 기쁘게 여기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여성들 가운데서 이러한 복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우 곤궁한 가운데 있으며, 기쁨이 없고 공허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삶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말하고 싶으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가정을 이루는 것처럼, 하늘에도 그들의 처소를 준비하도록 하고 싶다.
그녀는 목포 교회 부인반을 조직하여 여성들을 모아 성경공부도 하고 어린이들을 모아 찬송 노래도 가르치며 주일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1903년 9월에는 목포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남자들을 위한 영흥학교와 동시에 여학생을 위한 정명학교를 개교하여 지역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교육하였다. 목포의 최초 근대 사립학교가 벨과 스트래퍼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스트래퍼는 그러나 교육보다는 전도하는 일에 더 시간을 쏟고 싶었다. 목포에 프레스톤 부부가 합류하게 되자 여학교 사역을 프레스톤 부인에게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목포 인근을 순회하며 전도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무안이나 함평 지역은 물론 때론 선교사들과 함께 팀을 이뤄 목포 앞바다 섬 마을에도 찾아가며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복음의 소식을 나눴다.
1905년 초까지 목포에서 일하였고 벨과 오웬이 광주에서 터를 닦기 시작하자 광주로 옮겨 그곳에서 역시 여성사역과 어린이 주일학교를 책임맡아 사역하였다. 그녀는 아쉽게도 오래 사역하지 못했고. 1906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가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