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컬리는 테네시주 채터누가에서 나고 자랐다. 미국동남부에 있는 테네시주는 미국 바이블 벨트의 핵심지역이다. 미국의 보수적 백인 기독교 우파들의 활동이 왕성하고 흑백 분리주의 운동이 또한 유별난곳이다.하얀색 두건을 얼굴에 뒤집어 쓴 공포의 집단, KKK의 온상지였다.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흑인노예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던 남북 전쟁이 끝난 후, 전쟁에선 패하였으나 흑인에 대한 강경한분리주의를 고수하던 남부 연합군 출신의 여섯 장교들이 비밀 결사 조직을 만들었다.처음 시작한 곳이 테네시주다. 참전 군인들로 시작하였는데, 이내 정치인 뿐만 아니라 목사들까지 참여하는 거대 집단으로 성장했고 미 남부 여러 곳에확산되었다. 백인 우월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등에배치되는 흑인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가톨릭 신자,이민자, 동성애자 등까지 무차별적으로 적대 폭력학살을 자행 하였던 공포의 악마 집단이 이곳 테네시주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또한 테네시주는 미국 정치 종교 영역에서도 도드라지게 보수 우파 성향의 기독교 근본주의적 색채가 강한 곳이다. 미국 개신교 규모로 1, 2위를 점하는남침례회와 연합감리회 본부가 내슈빌에 있다. 미국대통령 선거를 비롯한 주요 정치 사회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상당한 표심이 몰리고 의사 결정의 향배를 주도하는 곳이 테네시다.전라도 마케도니아 환상테네시주의 수도 내슈빌(Nashville)은 우리 호남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미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대거 조선에 파송되어 지난1세기 동안 호남에서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 역사를펼쳤다. 그 힘찬 생명과 소망의 젖줄, 선교사들의 심장을 일깨우고 도전과 정열의 불을 지핀 곳이 바로내슈빌이었다.
1891년 10월, 미국 해외선교신학생연맹((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 집회가 내슈빌에서 열렸다. 조선에서 선교 사역을 하던 언더우드가 이곳까지 찾아와 감동적인 연설을 펼쳤다.아시아의 작은 나라 코리아에 선교사로 함께 참여하자는 도전의 메시지였다.1885년 한국의 첫 선교사로 찾아와 6년간의 멋진 1기 사역을 마친 언더우드는 1891년 안식년을 맞아고국 미국에 돌아와 있었다. 안식년 동안 미 전역의여러 교회와 신학교를 방문하며 강연을 하면서 한국을 소개하고 자신의 사역을 알려주며 홍보와 후원을요청하는 한편 젊은이들과 신학도들을 찾아 열정적으로 동원사역도 병행하던 터였다.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또 한 사람 윤치호의 호소도 참석한 신학도들의 가슴을 울렸다. 구한말 개화파 정치인 윤치호가 직접 전해주는 동양 미지의 나라 조선에 대한 이야기는 젊은이들의 심장을 뛰게했다. 그것은 마케도니아의 환상을 사도 바울에게 선명히 보여주듯, 하나님께서 조선을 깊이있게 참석자들에게 각인시켜 주는 큰 울림이 되었다.이 집회에서 즉각 반응한 이가 테이트, 레이놀즈와존슨 학생이었다. 테이트는 이미 한 달 전, 자신의 학교인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에서도 언더우드로부터강연을 듣고 조선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담고 있던터에 이 집회를 통해 결정적으로 그는 결단을 하게되었다.
버지니아 유니언 신학교 학도였던 레이놀즈와 존슨도 마음에 결단을 내리고 학교로 돌아가 동료 학우전킨에게 강력한 도전을 주었다. 누구보다 가장 앞장서 있었던 존슨이 사정상 중도에 뒤로 빠졌으나테이트, 레이놀즈에 이어 전킨 이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고 네 여성이 함께하므로 미 남장로교 조선 호남 선교가 시작되었다.1892년 늦가을 7인의 선발대가 내한하여 시작한 미남장로교 조선 선교는 이후 지난 100여년 동안 약450여 장,단기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전라남북도를중심으로 하나님나라 기독교 생명의 역사를 펼쳤다. 그들은 교회를 세워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학교를세워 청소년들에게 근대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병원을 세워 숱한 육체의 질병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그들의 수고와 땀, 많은 경우 자신들의 생명을내어 주면서까지 헌신하며 충성한 덕에 우리 조선의호남인들은 죽음에서 생명을 얻었고 절망에서 소망을 얻었으며 질병으로부터 고침과 회복의 은혜를 덧입었다.
그 수많은 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의 중남부 지역출신들이었다. 워싱턴을 경계로 남부의 버지니아와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이 거의 대다수를 이루었고 나머지 중남부 지역에서도 여러 사람이 함께 자원하고동원되어 조선 호남을 드나들었다.그 가운데 한 사람, 매컬리 선교사는 테네시주 출신이었다. 그런데 동향 테네시 출신의 호남 선교 동역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미 남장로교 선교의 태동지가 테네시주이고 이 지역이 미 개신교계의 상당한규모와 영향력을 지닌 곳이라서 이곳 출신들이 많을법한데, 상대적으로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테네시주 출신의 미남장로교 선교사는 10명이 채안된다. 그것도 절반은 2~3년 단기 사역자이고 10여년에서 20여년까지 비교적 오래 사역한 이는 매컬리를 비롯해 4명 정도다. 여수 애양원의 원목 더럼선교사의 부인 헬렌, 광주와 순천에서 행정 사역하였던 미첼의 부인 메리, 그리고 목포 교육 선교사 니스벳 부인이 그들이다. 이들은 다 여성 사역자들이고 매컬리는 테네시 출신의 미 남장로교 선교사로는유일한 남성인 셈이다.
헬렌(노혜련) 선교사는 2024년 초 현재 89세다. 녹스빌 인근의 메리빌 동네에서 한국을 위해 기도하며여생을 보내고 있다.테네시 주 동향 출신의 사역자가 상대적으로 매우적은 상황에서 그것도 헬렌과 메리는 해방후 내한한 한참 뒤의 후배들이었을 뿐이다. 매컬리 선교사가 사역한 호남 선교 초기엔 유애나 선교사가 유일한 고향 동무였다. 그것도 같은 사역지 목포에서 똑같은 시기에 함께 동역하였다.니스벳(Mrs. Nisbet, Anabel Lee Major, 유애나,1869~1920) 선교사는 매컬리보다 6개월 앞선 1907년 봄 남편 유서백 목사와 함께 내한하였고, 가을에 매컬리가 뒤따라 내한하였다.이들은 당시 잠정 폐쇄 중이었던 목포 선교부를 함께 복구하며 목포 사역을 일으키고 전도와 교육 사역 등에 주력하며 동역하였다.
유애나는 교육학을 전공한 첫 교육 선교사로서 목포 정명여학교의 초기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아쉽게도 1919년3.1운동 와중에 낙상 사고로 1920년 사망하고 말았다. 미국 같은 고향 출신의 두 선교사가 이역 땅 목포에서 벌인 귀한 사역과 우정은 불과 13년 정도였다.매컬리 선교사는 테네시주에서도 채터누가가 고향이다. 남북 전쟁때 남부군과 북부군이 대립하며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알려지는 채터누가(Chattanooga)는 내슈빌, 녹스빌, 맴피스에 이은 테네시 주 4번째 도시다.현재 미국에서 가장 친환경적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1950~60년대에는 철강과 화학 중공업 산업의활황으로 상대적으로 대기 오염이 심각하여 공해도시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공장의오염방지 장치 등의 대규모 정책과 운동으로 그리고최근에는 전기 자동차 버스 확충 등 친환경 전환으로 상당한 노력이 이어지며 현재는 탄소 줄이기 세계화와 맞물려 모범적인 생태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맹현리 선교사의 고향인 채터누가에는 지금도 그의많은 후손들이 기독교 신앙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교회와 학교 사역 등을 펼치고 있다. 채터누가 장로교회와 매컬리 학교 등은 그 집안이 일으킨 대표적인기관이다. 이 집안에서 나고 자라며 신앙과 선교에대한 꿈을 키우던 매컬리는 1907년 태평양을 건너 조선 목포에까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