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리(逆理)가 순리(順理)를 거스른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眞理)다.1945년 8월 15일 모진 박해와 고통을 주었던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 우리 민족이 지켜나갈 원칙과 가치, 곧 자유 대한민국의 토대가 될 상하이임시정부의 헌법이 1948년 5·10선거를 통한 남한 단독 정부인 대한민국의 골격 그대로 계승되어야 할 가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오늘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이 이러한 원칙과 가치 실현이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나라가 자랑스러운 자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수록 그 원칙과 가치들은 권리를 위임받은 자들이나 주권자인 국민 모두가 한결같이 지키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그러나 헌정 76년사는 독재자들의 입맛에 따라 헌법을 유린하기 십수 차례 누더기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민의(民意)는 끊임없이 개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가적 공식 행사에서 미국에서와 같은 기독교적 의식(儀式)을 행하였다. 유엔의 주도 아래 대한민국의 국기(國基)를 세우는 제헌국회 개원식에서는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 의원이 개회기도를 하였고,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직무를 다할 것을 선서하였다.
물론 이 때의 ‘하나님’은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믿어 오던 ‘천신’天神(하눌님)이나, 유교의 ‘천’天이 아니라 기독교의 하나님(GOD)이다. 이후 제1공화국의 국가 의식은 기독교식으로 진행되었다. 정부와 교회의 관계는 깊어졌으며, 공직에 등용된 인사들 중 기독교인의 비율이 높아졌다.
당시 기독교인은 전 인구의 5% 미만이었음에도 국회의원 21%와 장·차관 중 38%가 기독교인이었다. 해방 후 민족 지도자인 이른바 ‘3 영수’(김구, 김규식, 이승만)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가 우리 나라의 국교도 아니고 당시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진 것도 아니며, 상대적으로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진 외래 종교였지만, 최소한 해방 후 미군정과 제1공화국에서는 미국 개신교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유사한 시민 종교로 civil religion로서의 역할을 일정 부분 담당했다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가 냉전에 돌입하고 있는 시점에서 사회 전반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3·8선은 냉전의 출발점이었고, 한국전쟁은 미·소의 대리전이었다.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항해 피를 흘린 대한민국의 동맹임은 물론이고,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가능하게 해 주는 현실적인 힘이었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의 대륙 세력을 견제할 전략적 요충지로 한반도를 택했고, 한국은 공산당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할 동맹으로 미국과 손을 잡았다. 반봉건·반외세의 의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한국 교회는 이제 친미·반공 이념의 선두에 섰다. 한국 교회가 오래 전부터 미국과 가까웠던 것은 물론이고, 북한 공산당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고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가장 강력한 반공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비신자들도 한국 교회의 역할을 인지했고 그 이념을 공유하였다. 한국이 해방 후 상당 기간 기독교 국가 Christendom의 양상을 띤 것은 이런 역사적이며 현실적인 요인들이 결합한 결과라고 분석할 수 있다.
1945년 10월 미군의 남한 점령과 함께 각종 미군정 기구에는 경찰을 포함해 친일 관료들의 순치는 물론, 민족 대단결에 암적 존재가 되는 친일 민족반역자를 척결 배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오히려 그들을 중용하는 한편, 임시정부 요인을 경원(敬遠)하고, 공산 정권이 싫어 월남하여 그의 심복이 된 ‘공포와 무법’의 <서부청년단>과 더불어 극우 반공주의자로 둔갑시켜 자기 권력 극대화를 넘어 우상화로 치닫는 데 악용했다.
필자는 TV에 평양이 화면에 뜰 때마다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 우상화의 상징인 동상과 그 앞에 절하는 무지몽매한 인민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된 이후, 대한민국은 이승만 우상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담화문 정치’를 하였다. 그 좋은 예가 수도 ‘서울시’를 당신의 호 우남(雩南)을 따서 ‘우남시’로 바꾸려고 1955년 9월 16일 「수도 명칭에 대하여」라는 대통령의 담화문이 발표되었다. 당시 이 대통령의 제안은 형식은 ‘담화’였으나 실상은 ‘지시’였다.
서울시는 서둘러 ‘수도명칭조사연구위원회’라는 조직을 구성, 서울시의 새 명칭 현상 공모 광고를 신문에 실었다. ‘우남시’에 대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친일 충성파들은 밀어 붙였다. 그러나 1956년 8월 13일에 실시된 서울시의회 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들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우남시 계획은 무산되었다..
서울 남산과 종로 탑골공원, 부산 용두산공원에 각각 건립된 동상과 경기도 남한산성에 건립된 ‘송수탑’(頌壽塔)1955년 이승만 대통령 ‘80세 탄신’을 기념하여 대규모 경축 행사가 열렸는데, ‘축하’차원을 넘어 ‘이승만 우상화’나 마찬가지였다. 서울과 부산의 전차는 꽃전차로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고궁을 무료로 개방하는 한편, 백일장을 여는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승만 찬가’가 울려 퍼졌다. 이런 국가적 경축 행사는 3·15 부정선거가 있기 전 해인 1959년까지 전국적으로 성행하였다.
1958년 12월에는 서울 광화문에 ‘우남회관’(서울 시민회관 전신)을 건립했으며, 대전에는 ‘우남도서관’이 생겨났다. 자유당 정권 말기 ‘이승만 우상화’는 가히 광풍(狂風)과도 같았다. 독재자에 대한 우상화는 이처럼 무모하고 유치하며 우스꽝스러웠다.
대통령의 사명은 국민을 통합시켜 국력을 향상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의 ‘담화문 정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야말로 제주 4·3사건의 연장선상에서 관찰할 때, 특히 해방은 당연히 (통일)민족 국가를 수립케 할 것이라는 민족적 기대가 좌절되는 과정에서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채 위 두 사건이 체제 선택과 관련된 이데올로기 경쟁의 요소가 개입되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공산당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처단하라 하였고, 한국전쟁에서 후퇴하는 경찰에 의해서 사회주의 사상가 및 경찰의 유도로 무고하게 전향한 ‘보도연맹’ 가입자들의 집단 학살 사건을 비롯한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방위군 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국민의 억울한 희생에 대해서, 그리고 국정 전반의 실정에 대해서 사랑의 종교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장로 대통령으로서 단 한 차례의 사과를 한 일이 없었다.
친일파의 반공주의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이승만 대통령의 국회에서의 발언 가운데 “친일파에 대해서 제일 말 많이 한 것이 공산당”이라며, “친일파를 타도한 그 결과를 알고나 하는 말이냐?”고 협박까지 하였다(1948.11.6., 국회속기록).
스스로 절대 군주적 권력 누리기에 더하여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와 장경근 같은 친일파 간신배들의 반공 타령에 심취된 종신제 대통령은 도탄에 빠진 민생에는 오불관언(吾不關焉)하다가 결국 4·19혁명이라는 전국민적 저항에 침몰되어 하와이로 유배된 치욕의 역사가 제1공화국이다.
견딜 수 없는 전체주의적 체제에 맞섰던 명백한 지난 날 4.19 혁명의 사실(史實)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적 가치를 유린하면서까지 북한과 다를 바 없는 전체주의적 군주처럼 군림했던 그 치욕의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하는 <이승만 국부론> 띄우기 작업을 현 정권에서 진행한다는 소식은 다수 국민의 공분(公憤)을 일으킨다.
그 이유는 어떤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엄연한 민주국가임에도 국민을 겁박하고 굴종시켰던 전체주의적 위협이라는 지난 날의 역리 逆理 irrationality에 민주시민은 분노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라는 직은 국민으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아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서 봉사하는 자리라고 할 때,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이승만 정권의 심판을 내리고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자유·평등·사랑의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는 불편부당한 통치 행위로서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오롯이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선정善政을 하였더라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전국민적 존경을 받으면서 「국부」國父다운 칭송이 대대에 미쳤으리라. 그 좋은 기회를 자기 권력욕에 집중했던 역사의 퇴행은 이제는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