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석기 목사 상리교회 범사회문제대책운동본부 사무총장 |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한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했던 명언이 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더 낫다는 거다. ‘생각 없이’ 살아가는 돼지보다는 생각하며 살아가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게 더 낫다는 뜻이다. 그런데 동물도 생각을 한다. 저는 강아지를 키우면서 “동물도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주인이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기가 막히게 잘 안다. 주인의 표정만 보고도 분위기 파악을 한다. 개도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에 비하면, 생각의 폭이 많이 좁다. 그러나 개도 뭔가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사람만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다. 동물도 생각을 한다. 하지만 다른 동물과 달리 사람만이 가진 특성이 있다. 사람은 사명을 가진 존재이다. 사명은 ‘맡겨진 임무’를 의미한다. ‘사신이나 사절이 받은 명령’을 사명이라고도 한다. 사명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성이다. ‘인간’만이 가진 특성이다. 그런데 사명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무엇을 위한 사명인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에 독립투사들은 ‘조국의 독립’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에 독립투사들은 ‘조국의 독립’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625전쟁 참전 용사들은 ‘전쟁의 승리와 공산주의 괴뢰집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사명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의 사명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우리의 사명은 행 20:24에 잘 나타나 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것은 모든 크리스천의 사명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사명은 ‘주 예수님’께 받은 것이다.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 우리의 사명인 것이다. 이 사명에 충실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있다. 사명에 순종하는 그 영혼이 살아난다. 복음을 증언할 때, 우리에게 있던 무기력감이 사라진다. 마귀의 역사도 물러간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충실할 때, 임마누엘이 경험된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천국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상급이 쌓이게 된다. 이 얼마나 귀한 선물들인가? 왜 이토록 많은 선물이 주어지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사명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사명을 다하는 성도에게 많은 선물을 주시는 이유가 또 있다. 기뻐서이다. ‘복음 전하는 사명을 다하는 성도’가 기쁘신 거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을 좋아하신다. 그러니 그 일을 위해 애쓰는 성도가 기쁘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 ‘기쁨의 원천’이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얼마나 기쁘신지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더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받는 성도들을 대하실 때 자기 자식처럼 기뻐하신다. 그런데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주님의 품에 안긴 영혼은 더 기뻐하신다는 거다. 예수님께서 ‘하늘 아버지의 기쁨’에 대해 말씀하시며 비유를 들려주셨다. 어떤 사람에게 양 100마리가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그러면 양을 잃은 그 사람의 심정이 어떨까? 양 99를 들에 두고 그 1마리의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닐 것이다. 그렇게 고생고생하다가 잃은 양을 찾으면 어떻겠나? 그 기쁨을 어디에 비할 수 있겠나?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눅 15:5,6) 했다.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기쁨이다. 얼마나 기쁘시면 그 잃었던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러 오겠나? 그리고 또 얼마나 기쁘면 집에 와서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벌였겠나? 돈으로 계산한다면 잔치에 들어간 비용이 양 한 마리보다 더 많이 들 것이다. 그런데 왜 친구와 이웃을 불러다가 잔치를 한다고 했을까?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돈’으로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지고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은 ‘잃은 양’을 찾는 데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잃은 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잃어버린 양은 어느 특정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로 2가지를 의미한다. 1)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를 의미한다. 2) 교회를 떠난 교인들을 말한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교회에 발길을 끊은 사람을 말한다. 그들 모두가 ‘잃은 양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 잃은 양이 내 가족일 수도 있고 친인척일 수도 있다. 내 이웃일 수도 있고 직장동료일 수도 있고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은 모두가 ‘잃은 양’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이 ‘잃은 양’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지구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지구라는 행성에 큰 관심이 있지 않으시다. 우주가 아무리 크고 넓어도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한 영혼이 주님의 품에 안기는 데 있다. 이것은 편하게 잘 지내는 99마리의 양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99마리의 양들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있기에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다. 그러니 아무 걱정이 없다. 그러나 우리를 떠나서 어두움 속을 방황하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우신 거다. 그래서 이리저리 찾으시며, 언제든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이것은 집을 멀리 떠나있는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다.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자녀보다는 집을 떠나서 고생하는 자녀에게 마음이 더 가게 되어 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자녀보다는 몸이 아픈 자녀에게, 마음이 더 가게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하늘 아버지의 기쁨은 다음의 2가지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잃은 양’을 찾아다니며 얻은 기쁨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난 양을 잃어버린 사람은 양을 잃어버리고서 한숨만 쉬지 않았다. 양을 찾아 나섰다. 눅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하였다. 양을 잃어버리면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닌다. 그런 사람에게 ‘양을 찾은 기쁨’이 있다. 노력하고 땀을 흘린 만큼, 양을 찾은 기쁨도 큰 것이다. 두 번째, 하늘 아버지는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을 함께 나누신다.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양을 잃은 사람이 그 양을 다시 찾고서 너무나 기뻐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큰 잔치를 열었다. 그리고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이때 초대받은 친구와 이웃이 어떤 사람일까? 아무나 불렀겠나? 그럴 리가 없다.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양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며 고생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불러다가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잔치’를 열었던 것이다.
먼저 간절히 바라기는 호남기독신문을 애독하시는 분들 중에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빠지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란다! 모두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면류관과 상급도 받아야 한다. 천국 잔치에서 하늘 아버지가 주시는 큰 ‘상급, 영광’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으며 깊어 가는 가을에 우리 모두가 하늘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귀한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간곡히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