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을 경영하다보면 운영과정에서 부딪치는 애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숙제는 어떻게 하면 입소하신 어르신들을 편안히 모실지입니다. 세상 속에서 받은 작고 큰 상처를 말끔히 잊게 하고, 가슴 속 언저리에 아직도 품고 계시는 인생 보따리들을 다 풀어 제치고 가볍게 웃고 즐기며 사시도록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가슴 아픈 것은 이름 모를 질병들에 시달리시면서 지금도 일상 속에서 젖어든 삶의 습관들을 버리지 못해 언어나 행동이 난폭하여 자신과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분들도 계시고, 시도 때도 없이 일꾼을 구해야 한다고 시설 안을 헤집고 다니시는 분, 저녁 내내 한잠도 주무시지 않고 논밭을 멘다고 방구석마다 쥐어뜯는 분, 도배를 해야 한다고 높은 곳을 올라가시는 분들을 안정시키는 일들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요양 보호사 선생님들 대부분이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어서 잘 참고 돌봐 드리지만 어떤 선생들은 그분들에게 얻어맞고 화를 낼 때 그래도 참고 잘 해드려야 한다고 충고하면 나도 인권이 있다고 분을 내며 그 자리에서 이직해 버리기도 합니다.
충분히 그분들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가슴이 쓰립니다. 그래도 그 어르신들을 누가 돌봐야 합니까? 그분들의 모습이 내일의 나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하며 더 잘 돌보아 드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뼈 속 깊이 느끼곤 합니다.
내가 자주 선생님들과 기도하면서 나누는 이야기 한토막이 있습니다. 남아 연방 어느 고아원에서 부식도 충분히 공급해주고 최선의 환경조건을 만들어 아이들을 돌보와 주어도 아이들이 빼빼마르며 성장이 나빠 병의학적으로 검사를 해 보았으나 별 이상들이 없었답니다. 나중에 얻은 진단결과는 정신의학적으로 사랑의 결핍 때문인 것을 밝혀내고, 스킨십을 자주하며 애정으로 돌보아 주었더니 아이들이 건강해지고 성격들도 놀랍게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어르신들의 지나친 말썽에 속 태우며 억지로 제제해보려 했던 임시방편적 보호방침을 바꾸어 “그래도 사랑하자”는 모토로 끌어안아주고, 씻겨주고, 닦아주며, 정성어린 마음으로 간식을 드렸더니 포악하시던 분들이 잠도 잘 주무시고 말썽 부리던 분들이 오히려 피곤한 선생님들 걱정을 해주셨습니다.
강풍이 옷을 벗길 수 없지만, 햇빛은 저절로 옷을 벗게 합니다.
성경 누가복음 6장 1절 이하의 말씀 중에 예수님께서 로마 백부장에게 “이스라엘 중에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절)고 최고의 칭찬을 왜 하셨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당시는 하찮은 종이었는데 자기의 종이 병들었을 때 그 병을 치료해주려고 예수님에게까지 부탁한 그 마음 한구석을 예수님은 간파하셨습니다. 그 백부장은 로마의 장교이지만 압박민족인 유대인들을 위하여 회랑까지 지어주었다고 소개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신분 고하를 떠나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사랑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통하여 많은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격적으로 강조하여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무엇입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왜 엇갈립니까? ‘서로 사랑’하는 진실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임시방편은 효력이 금방 소멸됩니다. 마음의 응어리는 약도, 쇠도, 무기도 못 녹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우리이기에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갈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녹일 수 있는 최고의 처방은 사랑뿐입니다.
치매로 고생하시는 어르신 분들은 약으로 치유가 안 됩니다. 그들 가슴 안으로 스며드는 약효는 사랑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묘약입니다. 관계가 찢기고 얽히고, 응어리졌습니까? 치유 불능 입니까? 그래도 사랑하세요. 우리 선생님들과 함께 “그래도 사랑하자”고 힘껏 외쳐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