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지 맥크리디 프라이스 1913년에는 <비논리적 지질학>의 개정판인 <지질학의 기본>(Fundamentals of Geology)을 출간하였으며, 1923년에 <신지질학>(New Geology)을, 1925년에 <곤경에 빠진 진화론>(Predicament of Evolution)을, 1926년에는 <진화 지질학과 신격변설>(Evolutionary Geology and the New Catastrophism)을 출간하였다. 프라이스는 위에 언급한 여러 책을 통하여 창세기 홍수의 증거를 제시하고, 진화론이 사실이 아님을 주장하였으며,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근본주의 기독교에서는 죠지 맥크리디 프라이스의 이론과 주장을 정기 간행물과 잡지 등에 인용하고 이용하였다.
∎ 스코프스 재판
1914년에 진화론이 미국 교과서에 최초로 등장하였다. 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 있었던 당시 미국에서는 1923년에 최초의 반진화론법이 통과되어 공립 고등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칠 수 없었다. 반진화법(反進化法)은 대학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대학생이 많지 않았던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1925년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은 반진화법을 시험해보기로하고, 반진화법을 위반할 자원자(自願者)를 찾았는데, 존 스코프스(John Skopes)라는 기간제 교사가 자원하였다. 스코프스는 테네시 주, 데이톤에서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치고, 그 결과 스코프스는 고발당하여 재판을 받게 된다. 이 재판은 스코프스 재판(Skopes Trial)이라 불리며, 재판 과정이 미국 전역(全域)으로 중계되었다. 재판 과정을 중계한 언론들은 창조론자를 ‘무식한 촌놈(Hillbilly)’으로 몰아부쳤다. 재판 결과 스코프스는 반진화법(反進化法)에 의해 벌금형 판결을 받았지만, 형식적인 액수인 100불에 불과했다. 스코프스 재판은 절차상으로는 창조론자가 승소한 재판이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진화론의 판정승(判定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에 반진화(反進化) 운동이 약화하였으며, 1928년 아칸소 주에서 반진화법이 제정된 것이 유일하다. 반진화운동은 약화되었으나, 교과서 출판업자들은 논란을 피하기 위하여 진화론을 교과서에서 삭제하거나 모호하게 처리하였다. 프라이스의 주장과 자료는 스코프스 재판에서 창조론 측에서 유일하게 인용한 학문적 자료이었다.
∎ 과학적 창조론(창조과학)의 등장
미국 장로교 목사이며 창조론자인 해리 리머(1890-1952)는 과학연구소(Science Research Bureau)를 설립하여 회장으로서, 생물학, 고생물학, 인류학을 통하여 성경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활동을 하였다. 1941년 석사, 박사 학위를 가진 복음주의 신자들이 ASA(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을 설립하여,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복음주의 신앙이 직면하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구성원들은 다양하여 젊은지구 창조론자, 오랜지구 창조론자, 유신 진화론자들이 ASA 회원으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