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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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말기 로마가톨릭교회 제도는 성직자(사제 계층)와 평신도의 이중적 계급 구조였다. 사제 계층만 거룩한 직분을 가진 자들이며, 평신도는 속되거나 의롭지 못한 직업을 가진 자들이라는 이원론적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원론적 구조는 타락한 사제들의 평신도 억압과 오도(誤導)를 부추기게 했고, 평신도들의 신앙적 자유와 건전한 책임 의식을 앗아가 버렸다. 사제들은 자신들의 특권 의식을 오용하여, 윤리적, 도덕적 타락과 방종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평신도들은 건전한 자기 존중감이나 직업에 대한 기본적인 소명의식에 무지하다 보니 노동에 대한 신성함이나 애착도 없이 영적인 방황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1974년 말로 기억된다. 필자가 S교회 장로로 섬기고 있을 당시, 담임 목사가 교회의 바른 질서를 세워야 하겠다는 취지로 1975년 예산에 성직(담임목사, 부목사)과 교육직(파트파임 목사, 전도사), 관리직(심방 전도사, 교회 관리)으로 구분하여 예우의 기준을 제시한다고 하면서 항목과 액수를 적은 자료를 당회에 제출하였다. 이 자료를 접한 당회는 이에 대해서 장로의 답변이 있었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을 성도(聖徒)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Divine Calling)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교회 내의 직분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사회 생활의 직업(Calling) 또한 소명(Calling)이며 성직(聖職)이다. 그러므로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주어진 고귀하고 값진 노동행위이다. 따라서 성직, 교육직, 관리직이라고 구분하는 것 자체가 성경과 대치되는 오류이므로 바로 잡아 논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를 철회시킨 바 있다. 교회를 전임으로 섬기는 교역자들이나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초신자나 모두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들이며, 나아가서, 성도들의 생활 전선에서의 노동 현장은 하나님께서 직업을 주신 소명의 실천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 진리라는 입장의 피력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만인 제사장’론은 곧 ‘만인 성직자’론 또는 ‘만인 소명론’으로 확대 적용해야 비로소 개혁주의 교회라는 점을 분명히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도 목회자 성직주의에 젖어 있는 미신적 신앙의 오류에 빠져 있는 목회자나 성도들이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세 로마 교회의 또 하나의 오류는 성(聖)·속(俗)의 분리였다. 즉 시공간의 피조 세계 중 일부를 성스러운 것으로, 또 다른 일부는 속된 것으로 구별하는 선악 이원론이었다. 예를 들어, 성당 건물은 거룩하고 성당과 떨어져 있는 일반 건물이나 세상은 속된 것이라는 오도된 사상이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미신적 성속론과 다름이 없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 탐방을 ‘성지순례’라 칭하는 것이나 예배당을 ‘성전’이라 여기는 것이 이런 경우다. 특별한 일부의 장소와 공간, 혹은 특정한 때와 시간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모든 공간과 시간이 거룩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며, 모든 일과 노동이 정직하고 신실하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삶의 예배 생활 모두가 거룩하고 신성하다는 것이 개혁자들이 강조하는 바 소명자의 직업 윤리 의식이다. 한 마디로 소명자에게 주어진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의 면전에서’의 삶의 태도이다.
그래서 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교사도, 일반 성도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 교리를 성립했으며, 나아가서 교회가 하나님이 부여하신 질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교회 내 직분상의 구별(차별이 아닌)이 성경적이며 합법적인 제도임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만인 제사장’ 교리에는 ‘만인 성전’ 교리가 있는 바,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으로 오심으로써 외형적인 건물로서의 ‘성전’(聖殿) 개념은 폐기되고, 믿는 성도들의 몸 자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는 가르침이다. 비인격적인 성전이 모형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의 지체들로 이루어진 모임이 곧 인격적인 ‘교회’(ekklessia)라는 실체가 된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모든 믿는 이의 몸 자체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기에 믿는 이들의 모임인 교회는 당연히 성전이 된 것이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22) 성도들의 몸과 공동체가 신령한 성전이지, 예배당 건물이 교회이거나 성전일 수 없다. 그래서 이제는 한국 교회가 성전 건축이라는 미명 아래 자랑하고 추구해 온 예배당 건축 이데올로기라는 영적 질병을 극복해야만 이 땅에 기독교는 살아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 상에서 자신의 몸을 영원한 제물로 드리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제물, 산 제사가 되었다는 확고한 성경관을 가져야 한다(롬12:1).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 자신의 몸인 성전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산 제물로 드리는 참 제자의 삶과 예배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확고한 성경관을 가진 입장에서 필수적인 직업(職業)에 대해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생각해 보자.
앞서 필자는 모든 직업은 ‘성직“(聖職)이라고 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노동관’(勞動觀)에서 출발한다. 노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신 복이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시는 ‘영원한 노동자’이시며, 예수님 또한 자신을 ‘일하시는 주님’으로 밝히셨다. 이렇게 볼 때, 노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신 저주, 또는 범죄한 아담에게 대한 심판(창 3:14-17)으로 잘못 해석하여 노동을 저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노동의 목적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의 성공인 것처럼 생각하는 천민자본주의가 만연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은 돈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더욱 적극적으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 6:33) 말씀하심으로써 재물의 ‘소유’보다 노동의 ‘가치’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일에 매진하라고 가르치셨다.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전념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직업’을 돈 버는 수단으로 평가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저속하고 심각한 왜곡이다. 임금(賃金)은 노동의 결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부수적 대가일 뿐이다.
그럼에도 현대인은 소명으로서 직업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어 삶 자체가 사막화 되어버린 단순한 밥벌이 수단(Job)으로 전락해버린 노동관을 갖고 있다. 노동에는 그 이상의 고귀한 의미가 있는바 인간은 노동에서 금전으로 환산 할 수 없는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그럴 때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확인 할 수 있다. 노동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부르심(Calling) 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일(노동)의 목적이며,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고귀한 가치가 여기에 있다.
목회자에게는 성도들에게 꾸준히 복음적 소명 의식을 고취시켜야 할 책무가 주어져 있다. 목회자가 교회에 제사장으로 임명되고 파송되었다면, 그리스도인 각자는 그의 직장에 제사장으로 임명되고 파송되었다는 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가 파송된 목적은 돈을 많이 벌어 교회에 많이 바친다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섬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노동으로 볼 수 없는 직업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그리하여 내가 하는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살맛나고 공정하며 상식이 통하는 건강한 이상향을 지향하는 이들로 꽉 차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건강한 직업은 거의 예외 없이 본질적 의미에서 ‘성직’으로서 ‘영원하고 거룩한 산 제사’(롬 12:1)를 드리는 일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