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은 ‘오직예수’신앙이며, 거룩한 소망가운데 ‘진리를 실천’하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사랑과 섬김’으로 사는 신앙입니다. ‘화락능실’(花落能實)이란 말이 있습니다. 꽃이 지고 떨어져야만 과실을 맺는다는 뜻입니다. 꽃이 짐으로써 그 자리에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창조주의 절대섭리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죽음을 피해 보려고 혼신의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러나 예외 없이 결국은 속수무책 죽음 앞에 절망하며 패하고 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뒤 바꿔 놓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유사 이래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죽음 앞에 굴복하였으나, 그러나 여기 하나의 예외가 있으니, 그것이 곧 우리 예수님의 부활사건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육체적 생명을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놓으셨으나 그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새로운 부활의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이 질문은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슬퍼 애통하던 마르다 에게만 던진 예수님의 질문이 아니라 오가는 모든 시대의 인류를 향해 물으시는 준엄하신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고 사느냐에 따라 영생의 길로 가느냐 아니면 멸망의 길로 가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늬만 성도일 뿐, 실상은 바른 기독교의 부활신앙에서 떠나 있는 허상적 세속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인생의 모든 문제가 예수님과 직결됩니다.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살고 죽는 것이 오직 예수님을 위한 것임을 천명한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은 물론 그 분만을 바라보면서 그 분을 기쁘게 해드리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한 소망은 우리 자신을 깨끗하고 성결한 삶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자기 자신을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진리의 말씀을 실천케 하는 원동력입니다. 복음을 삶으로 증거하며 사는 성도는 사랑과 섬김을 통해 살아 계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개인과 사회와 국가민족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교회를 지탱하고 부흥시킨 것은 부활신앙입니다. 믿음을 잃고 변질된 베드로가 승리하여 마지막 순교의 자리에 까지 나아가게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식었던 믿음이 회복되고, 잃었던 사명과 소망이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와 사망과 악한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표징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승리가 보장된 바, 어렵고 힘든 때 일수록 부활신앙을 붙잡고 힘차게 나가야 합니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심각한 영적 위기의 징후들이 교회의 안과 밖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팽배한 교권주의는 그릇된 선민의식을 낳았고 그 결과 교회 지도자들의 일탈과 독선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빠진 교회와 성도들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별다를 바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역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대다수의 지도자들은 두려움도 없고, 세상 흐름이 그러니 별 수 없다는 식의 안일무사주의에 젖어 복음에 대한 열정마저 식은 채 자기중심적 사고와 판단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안타까운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이며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는 일찍이 영적 잠에 취해 있는 교회들을 향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 죽은 자여 깨어나라. 둔감한 죄인이여 잠에서 일어나라”고 외쳤습니다. 교회 위기의 외적 요소는 다음세대인 교회학교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과 청년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떠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절대적 가치관이 무너지고, 더불어 주5일제가 정착되면서 신앙생활은 취미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등과 같이 여럿 가운데 하나처럼 돼버렸습니다. 이로써 절대적 신앙이 상대적 신앙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영향은 교회 구성원의 연령별 분포도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장년층보다 어린아이들이 많은 피라미드형 구조였는데, 지금은 장년층이 훨씬 많은 역피라미드형 구조로 변했습니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머지않은 장래에는 노년층만 가득하고 젊은 층이 사라지는 ‘T자형’ 구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만큼 다음 세대의 신앙문제는 심각합니다. 이런 때에 한국교회는 성도들에게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게 하고, 다음 세대의 신앙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직 성경중심 운동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저출산 문제가 심각합니다. 도를 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심각한 저출산 문제에도 자녀를 키우는 가구에 대한 세제 혜택이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보다 적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의 ‘저출산 극복을 위한 세제혜택 확대방안’보고서에 따르면 저출산 및 고령화로 인해 우리나라의 2030∼2060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 잠재성장률은 연간 0.8%로 전망됩니다. 이는 OECD 평균(1.1%)을 밑도는 수치로 캐나다와 함께 최하위권 수준입니다. 이는 저 출산과 고령화, 반교회적 사회 분위기 등의 영향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와 교회학교가 분리된 상태로 운영되는 것과 가정과 교회, 부모와 교회학교 교사간의 유기적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단과 교회들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까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다시 한 번 생명력 넘치는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국가의 총체적 난맥상 앞에서 불안해하는 이 나라 백성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곳은 교회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와 죽음과 악한 사단의 세력을 물리쳐 이기시고 승리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본 받아 “부활신앙”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다음세대를 세우기 위해서도 가정과 교회 안에 부활신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길만이 이 나라 와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고, 온전히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옷 입은 하나님 나라의 존귀한 백성들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