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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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 도미 중 절친의 호의로 여행을 하면서 콜로라도 강 지류에서 급류타기를 경험한 일이 있었다. 보트에 승선하기에 앞서 타는 방법과 요령, 그리고 기본 실습에 이어 주의사항을 듣고 리더의 구호에 따라 강줄기를 따라 흘러갔다. 급류타기는 한 마디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쏟아지는 너울성 물폭탄하며 곳곳에 돌출된 날카로운 바위들, 심지어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물 속에 우뚝 솟은 바위덩어리들을 휘감아 흐르는 급류의 방향은 우리가 탄 보트를 정신없게 만드는가 싶더니 순간 곤두박질치게 하는 것이었다. 고무보트에 탄 일행 중 필자가 최연장자였음에도 나름대로 힘과 요령을 다해 노를 저었지만, 보트는 일행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마치 예정된 운명의 코스를 달리듯 무서운 속도감으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고무보트에 탄 일행이 새로운 위험에 부딪쳤을 때, 우리는 이미 늦었음을 깨달았다. 왜냐 하면, 거센 급류가 순식간에 우리가 탄 보트를 집어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코로나19와 제4차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현 세계의 변화는 문자 그대로 ‘급류’(急流)이다. 필자가 탄 보트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급류에 빨려듦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교회’(Church)를 상징한다. 나아가서 교회 사역은 마치 물보라를 일으키며 쏟아지는 계곡을 누비면서 노를 저어가는 보트처럼 교회는 불안한 세상의 급류 속에서 중심을 잃고 제자리에 빙빙 돌고 있는 형태라 하겠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열심이었고 세계 교회가 주목할 만큼 외형적으로 성장했었다. 그러나 어느 때 부터인가 유감스럽게도 한국 교회는 사회로부터 외면 당하는 위치로 곤두박질쳤다.
2014년 1월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발표한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 교회의 신뢰도는 19.4%에 불과했다. 종교 간 신뢰도 비교에서 개신교는 21.3%, 천주교 29.2%, 불교 28.0%인 점을 감안하면, 한국의 3대 종교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했다. 더욱이 ‘무종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천주교 32.7%, 불교 26.6%에 비해 개신교의 신뢰도는 고작 8.6%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고도의 성장을 이루었던 한국 교회가 어쩌다가 이처럼 급류에 곤두박질치는 퇴행을 가속화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야 다각도로 분석 할 수 있지만, 한 마디로 총체적 부패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는 한국 교회의 고질적 병폐인 ‘말씀의 부재와 왜곡’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단정 짓는다면 무리일까? 한국 교회의 타락은 신학적 빈곤이나 부재가 아니라, 종교와 신학에 반드시 앞서야 하는 말씀의 부재와 왜곡에 따른 해석, 그리고 적용의 중대한 오류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진단이기 때문이다.
강단은 ‘말씀’을 증거하는 도구의 역할에서 벗어나 ‘말씀’을 지배하려는 신학의 과잉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고 지금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두 사람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 땅의 역사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강설자들이 신학적 소경이 아니라 ‘성경적 소경’, ‘영적 소경’이다. 강설자들이 진리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았다면 허튼 회개로 세상에서 조롱 당하고, 주님께서 질타하신 ‘외형주의’ 번영신학에 혈안이 되지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
수 많은 간증자들은 서슴없이 성취와 성공은 ‘하나님의 영광’, 실패와 침묵은 ‘하나님의 망신’으로 표현한 데서 신앙의 타락을 엿볼 수 있다. 수능, 각종 고시, 임용, 승진, 사업 성공, 당선 등 세속적 성공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신성모독적 가치관이 독버섯처럼 자리하고 있으니 교회 안이나 밖이나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계신 무게, 탁월함, 경이로움을 뜻한다. 즉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문제로서 명예, 명성, 소유, 허영 등과는 반대 개념이다.
뿐만이 아니다.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전환기에 지구를 덮쳐버린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사태는 바이러스 퇴치와 방역이라는 본질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 이념적 대치로 온 나라를 진영논리와 여러 계층 간의 갈등으로 몰아감으로써 온 국민의 마음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정교 분리’(政敎分離)라는 대명제 아래 국가 주도형 K-방역에 협치(수용)냐? 갈등(거부)이냐의 관계가 이념 대결 내지는 정권심판론으로 발전함으로써 성숙한 기독교적 시민 정신은 한층 깊이 묻혀버렸다.
또 한 사태는 전광훈 목사의 광화문 광장 집회가 속칭 ‘태극기 파’(派)의 선봉에 서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게 된 일이다. 2020년 광복절에는 코로나 확산을 우려한 서울시의 집회 불허에도 집회가 강행됐다. 이는 사랑제일교회 수련회와 더불어 코로나 2차 확산의 도화선이 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본래 광장의 종교이다. 교회가 때로는 ‘광장’(Public Square)에서 세상과 소통함으로써 세속 사회 한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광훈 목사의 방식은 아니다. 그의 방식은 몇 가지 이유에서 비판 받아야 했다.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속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가이사를 사고 있는 속물이다. ‘1천만 자유통일기도회’라는 명칭이나 ‘국민혁명당’이라는 정치집단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또한 그가 사용하는 거친 언어는 시정잡배 못지 않다. 그가 거침없이 내뱉는 반말과 욕설, 그리고 성적 비하와 혐오성 발언에다가 또 가짜 뉴스는 거짓 확신과 오만으로 가득한, 빈곤한 내면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목사의 본연의 사명과 품위를 완전히 떨어뜨렸다. 거기에다가 시대 정신에 뒤떨어진 이념과 기독교를 일치시키는 것 또한 문제이다. 한심하게도 그의 시각은 반공주의와 신업화가 대한민국의 주된 어젠다(Agenda)였던 1970년대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한 프레임으로는 현재 우리 사회를 진달할 수도 없고, 현실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에게 구원을 제시 할 수도 없으며,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광훈의 극우가 모였던 광화문 광장은 광장이 아니라 그들만의 ‘하나의 섬’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대의명분이 없는 전광훈 개인의 패착(敗着)으로 귀결되었다 하겠다. 증명도 반박도 불가능한 주장을 큰 소리로 선포하고 그 주장에 열광하는 닫힌 세계에 공론의 장(Public Sphere)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고립된 섬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따라서 사회적 비난은 고스란히 기독교를 향한 것이 가슴 아프다.
이상과 같은 여러 상황에 대안도 제시 못하는 한국 교회는 무기력에 빠져 있다. 방역 초창기부터 비대면(On-line) 예배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비생산적 논쟁이 계속되었고, 사회주의 정부가 교회를 박해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남북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 나라는 군사독재시대에 민주화 운동에 목숨을 걸다시피한 운동권 곧 학생들과 참여자들을 ‘주사파’라 낙인 찍고 그들은 곧 빨갱이 공산주의자라는 등식의 프레임을 씌워 자금 이 순간까지 매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특정지역을 좌파 공산주의 집단으로 매도하는 언행은 우려할만하다. 물론 김일성 주체사상을 학습한 일부 주사파가 실존하고 있겠으나 혁신적 사관을 가지고 있다 해서 좌빨은 아니다 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본래 정치적 보수의 색채가 강한 한국 교회는 전광훈을 둘러싼 반정부 운동과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정부 주도형 방역 활동을 교회 탄압으로 규정하여 저항하는 등이 뒤얽혀 마침내 사화주의 좌파정부 안에서 코로나와 가짜 뉴스의 온상이라는 지탄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미래 교회의 전망은 아주 어둡다.
익숙한 옛 질서와 아직 오지 않은 새 질서 사이의 갈등과 혼선이 공존하고, 북한의 핵 보유와 우크라이나 사태는 우리에게는 매우 위협적이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교인들 간에도 고착됨으로써 역동성을 상실했고, 젊은이들 2030세대들은 미래를 꿈꾸지 못한다. 4차 산업혁명이 다가오지만, 혁명 전야의 기대와 설렘 대신 디스토피아의 공포가 우리를 압도한다. 언제까지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최고의 덕목으로, 서로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우리의 영혼을 좀먹게 할 것인가.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총회에서 답을 찾자(6-11), “많은 변론”(7절)과 격렬한 토론이 오고간 끝에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른바 평등한 ‘집단 지성’이 발휘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①상황의 변화 ②성경(구약)의 가르침 ③성령의 역동적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순종)함으로써 초대 교회는 기독교 세계화의 초석을 놓았다. 이 교훈에서 한국 교회가 급류를 거슬러 흘러가는 지혜를 얻어야 다시 생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