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국 선교사가 ‘토끼와 거북’이란 동화내용 중에 왜 한국 사람들은 거북이를 더 좋아하는지 의아스럽다고 했습니다. 그의 반론인즉 거북이가 얄밉다는 것입니다.
토끼가 자고 있으면 슬며시 옆으로 지나갈 것이 아니라 깨워서 정정당당하게 경주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승부욕도 중요하지만 도덕성도 무시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거북이의 정신이 더 매력을 느낍니다. 목적지인 정상을 향해 쉼 없이 뚜벅뚜벅 전진하지 않았습니까?
요즈음 조금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이면 노후대책 이야기로 심각해집니다. 어느 선 까지 일하다가 좀 나이가 들면 편히 철수하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생각임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나이 때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 하고 살았기에 우둔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28세부터 교사생활과 공무원생활, 그 후 목회자로서 정신없이 42년 동안 살아오면서 적금 한 푼 들지 못했고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이후생활 걱정도 못 해 보았기에 바보였는지 무능력자였는지 지금 생각 해 보면 아찔한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신비한 것은 지금도 밥은 안 굶고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한가하게 유유자적하는 시간적 여유는 없지만, 계속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행복인 것 같아 불만도 후회도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그의 저서인 ‘존재에서 용기’란 책에서 현대인의 불행은 생의 무의미로 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멈출 줄 모르고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거북이처럼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무료해서 싫습니다. 노인성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우선 안정과 현상유지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청년이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 이미 노인입니다. 달팽이처럼 자기의 성 안에 들어가서 바깥 눈치만보는 사람은 젊어도 이미 노인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발전의 찬스가 없기 때문에 이미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른 것입니다. 피가 끓어야 젊은이이고 움직여야 청년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동사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론가도 아니었고, 책 한권 써낸 일도 없으나 계속 바쁘게 움직이셨습니다. 계속 외치고, 달리고, 고치고, 여행하고, 가르치고, 채찍질하고, 도와주고, 남의 발까지 씻겨주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쉴 새 없이 행동했던 생활 이었습니다.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살면 좋겠지만, 무의미하게 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꼭 짧은 시간이라도 그 내용이 알차다면 사실 그 사람은 오래 산 것입니다. 사람이 시간의 길이에 속아 살면 안 됩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청년성에서 노인성 인생으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류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이 젊어 거북이처럼 계속 움직이고, 목표를 향하여 전진 한다면 그 사람은 곧 청년성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3년이란 짧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류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처럼 짧은 시간을 영원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시간 속에 자기 자신을 한 알의 밀알로 묻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 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장 24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폴 틸리히가 말 한대로 현대인의 불행은 바로 무의미한 생활입니다. 폭포를 거슬러 치고 올라가는 연어가 부단히 도정하고 내일을 위해 희생 하는 것처럼 미래와 누군가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하는 삶, 바로 그것이 청년성 인생관입니다.
그래서 잠자는 토끼보다 계속 전진하는 거북이가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