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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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리는 정체성에서 나온다.
초대 교회가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믿음을 유지하고 세상을 변화시켰던 것은 자신들이 누구이며 또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는지 그 정체성Identity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기독인들은“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라고 고백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님이시라는 고백은 비록 짧지만, 세상을 흔드는 신앙의 원초적 힘이었다. 기독인들은 ‘세상에 있지만’(요17:11) ‘세상에 속하지 않은’(요17:14)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민권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고 믿었지만(빌3:20), 그들만의 도시에서 살지 않았으며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당시 기독인들은 로마 제국의 다른 사람들과 먹고 자고 입는 것에 있어서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삶의 양식을 갖고 살았다. 도덕적으로 매우 엄격했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살았으며, 극심한 박해 가운데서도 자신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조차도 사랑했다.
윤리는 정체성에서 나온다는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l의 주장처럼, 초대 교회 기독인들의 삶은 그들의 정체성이 겉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그들은 언약 공동체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였으며, 고백대로 살고 고백대로 죽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것을 믿음의 증거로 여겼다(요15:19). 그들은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없게 서게 하실 이”(유1:24 )에 대한 소망을 따라 살았다.
이 기간에 교회의 현존presence은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었고, 사람들 역시 전염병 세계적 대유행 속에서 교회의 현존을 원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초대 교회 당시 교회의 현존을 요구했던 사람들과 달리 오늘날에는 세상이 교회의 부재(absence)를 요구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 대의명분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세상을 위해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어아야 할 교회가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종교화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오늘날 교회는 혼돈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 혼돈의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먼저 초대 교회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면서 문제에 대한 혜안을 발견해야만 할 것이다.
∎ 고난 속에서 소망하는 법
세계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인류는 코로나19를 기점으로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나누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가장 큰 변화는 교회의 현존이 필요했던 앞선 2~3세기의 로마 제국이나 개신교 선교 초기의 한국 사회와 달리 오늘날 세상은 교회의 부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교회의 현존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의 현존이 사람들에게 근심거리로 여겨지고 있다. 제임스 화이트의 말과 같이 교회는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대의명분을 제공해 주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코로나19 이후 한국 교회는 세상을 향한 대의명분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대의명분을 상실한 한국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이 글은 이 질문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것은 방향성과 관련이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교회의 출발점을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초대 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것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 역사 속에서 보았 듯이 어려움 속에서 교회는 더 성숙해졌고 부흥을 경험하였다. 2~3세기에 기독인들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조롱과 박해를 받았다. 종교 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들의 삶도 초대 교회 기독인들이 당했던 어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한 말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3·1운동으로 인해 투옥된 사람들 가운데 기독인의 수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복음이 흥왕했던 시기이지만 각각의 시기에 살았던 기독인들은 오늘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이 시기의 교회는 가파르게 성장하였다. 로드니 화이트의 표현대로 그들은 각각 동 시대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규범과 새로운 유형의 관계를 제시했다. 그리고 교회가 제시한 규범과 새로운 형태의 관계는 교회 현존의 당위성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점은 확고한 기독교 정체성이다. 윤리가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에서 윤리가 나온다. 구한 말 교육자요, 독립운동가였던 남강 이승훈 장로는 나라를 잃은 절망 속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르면서도 말씀 속에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법정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선언하였다. 이승훈이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불굴의 신앙으로 3.1운동 민족대표로 당당히 앞 섰다. 복음이 삶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교회가 공격을 받는다고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어쩌면 어려움 속에서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 씨.에스. 루이스C.S. Lewis는 『영광의 무게』에서 재난이라는 상황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재난은 문제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면이 빛을 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다. 코로나19로 그 동안 감추어졌던 한국 교회의 많은 문제들이 겉으로 드러났다. 어쩌면 이 문제는 코로나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부흥이 아닌 붐을 성장이라는 착각의 그늘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났을 뿐이다.
교회는 다시 소수의 알곡의 자리로 채워져야 한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소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교회가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고난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여길 것이 주위 사람들에게 교회의 주장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가 되어야 한다. 로마 제국에서 살아가면서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도시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고 이웃을 향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조차 내어 놓았던, 그리고 구한 말 혼돈의 시대 속에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 들어갔던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을 본 받아야 살아 있는 교회요 살리는 교회이다.
나아가 믿음의 공적인 측면을 재확인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만유의 주님이라는 고백은 비록 짧지만, 세상을 흔드는 신앙의 원초적 힘이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신앙을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공적인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이시라는 고백 때문이었다. 앞서 고찰한 바와 같이 믿음의 선배들은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였다. 세상에 들어가 당시 세상이라는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재난에 대처하는 교회의 성숙함, 그리고 공공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선포했던 선진들의 헌신과 당당함을 배워야 산다.
현재 한국 교회가 직면한 가장 커다란 문제 가운데 하나는 신앙의 개인주의화이다.
개인주의화의 종점은 속물시대(Snobocracy)의 쓰레기장이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2~3세기 기독교가 로마 제국 내 다른 어떤 체계보다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신앙으로의 공동체성 때문이었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러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온을 바라보며 울었던'(시 137:1) 그 힘든 시기가 바로 회복의 시작이 었던 것처럼, 코로나 19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어 다시 복음이 흥왕하게 일어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