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번역운동은 한국의 언어를 한국의 문자로 정착시키는 데 큰 영향을 가져왔습니다. 언어와 문자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친 한글 성경의 번역 출판은 기독교의 경전이 갖는 무게만큼 한국의 중세봉건적인 사상을 변화시키는 데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글성경은 평민이 사용하는 언(용)어를 평민이 이해하는 문자(한글)로 붙잡았다는 점에서 주목되며, 성경의 보급 시기가 신.문학 운동이 일어날 때였던 만큼 한국의 신.문학 운동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성경번역과 출판은 한글의 민족의 문자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성경과 전도 문서를 읽히기 위한 선교목적으로 한글배우기 운동을 일으켰으며, 기독교 학교는 한글을 성경 다음의 필수과목으로 이수했는데, 결국 한글을 깨우친 이들이 성경과 여러 책들을 많이 읽게 되어 개화의 역군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즉 기독교는 한글성경 번역을 통해 한자문화·한문숭상의 주체적 전통에 짓눌려 천시되어 오던 한글의 가치를 상승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1919년 3·1운동을 비롯한 한국 기독교 민족운동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임시정부의 1919년 4월의 약법(헌법)을 성경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의 구체적 사례로 봅니다. 혈통신분제를 극복해 가면서 일제강점기를 맞은 한국사회는 서서히 군주, 양반 중심의 전제 군주적 구 왕조 회복을 의미하는 복벽(復辟)사상을 극복하게 되었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정치제도인 민주공화국 사상을 수용하였습니다.
그 결정적 계기가 3·1운동이었습니다. 33인 중 16명의 기독교 지도자가 참여한 3·1운동은 그 독립선언을 통해 백성이 주인 되는 민주국가를 건설하려고 천명했습니다. 그들의 염원이 제도적으로 실현된 것이 1919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입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을 지탱하기 위해 설립된 임시정부와 임시 의정원에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한 것은 기독교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으며, 만민평등의 성경적 세계관이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국 성서운동사에서 1911년은 신·구약 성경전서가 출간되고 영국성서공회가 종로에 성서 회관을 마련한 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한국의 토착 교인들이 비로소 신약과 구약을 함께 같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신약과 구약 사이의 균형 잡힌 신앙,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통전적인 신앙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기반으로 설립된 한국교회는 비약적으로 성장하였고, 성경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성서를 통해 문맹 퇴치는 물론, 사회 개발, 질병, 난민, 이주노동자 문제 해결 등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기독교가 성공적으로 수용된 배경에는 사회문화적으로 문맹률이 낮았고, 새로운 지식에 대한 수용이 준비되었습니다. 기독교가 한국 근대 화에 미친 영향으로는 1885년 4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료기관인 광혜원(4월 26일 제중원으로 개명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명)이 알렌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고 1886년 정동의 언더우드 사랑방에서 언더우드 선교사가 고아원 학교를 시작했는데, 이는 예수교 학당으로 바뀌고, 1905년에는 경신 학당이 됨으로 경신학교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아펜젤러는 1886년 배재학당을 세워 최초의 근대교육의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스크랜톤 부인은 정동에 여 학당을 설립했는데, 명성황후가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식 고등교육의 출발은 1886년 제중원의 의학부로 개설된 후 1899년 정식 의학교로 발전된 세브란스의 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최초의 의학교인 동시에 고등교육 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습니다. 교육선교는 한국인들에게 더 나은 삶, 풍요로운 삶, 민주적인 삶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민중 계층은 의료와 교육선교를 은혜의 행위로 수용하였으나, 식자층과 지배층은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경제활동에 있어서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 의거한 개신교의 전래는, 한국 사회에 정미업, 과수원, 제지회사, 도기회사 등을 설립하게 하였습니다. 김기호는 1905년 면직 공장을 설립하였고, 오윤선은 인정도서관을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박치록은 면사를 이용하여 단순한 양말, 장갑, 타올 등을 생산하는 메리야스 공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근대문명의 산파 역할로 가난과 기근, 전염병과 문맹의 악순환 그리고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상황 속에서, 개신교를 통해 유입된 근대문명은 유교적 가치관과 사회질서에 묶여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즉 개신교사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당시 사람들에게 미친 파급효과는 강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교 초기의 개신교는 당시 사람들에게 종교라기보다는 근대문명의 산파로 생각되었습니다. 사회와 문화 체계를 변화시켰습니다. 결국 개신교로 인해 도입된 근대문명은 한국 사회와 문화 체계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이광수는 개신교에 대해서 ‘개신교는 어두운 한국 사회에 구미의 새로운 문명을 제일 먼저 도입하여 문명개화와 자유인권의 선구자가 되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개신교는 봉건사회에서 양반에 억눌렸던 상인, 천민, 여성들에게 인권, 자유와 평등의 관념을 제공하였습니다.
성경 번역은 한국 사회의 각 분야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885년 4월 5일 죽어가는 조선 사람들을 위해 선교사로 처음 오신 아펜젤러는 ‘나는 오직 한국을 위해 산다’라며 목포양동교회에서 성경 번역 위원회에 참석하고자 1902년 6월 11일 목포에 오시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사고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아펜젤러 선교사가 승선했던 배는 목포를 향하고 있었는데 군산 근교(서천)에 이르렀을 때, 다른 배와 충돌하여 침몰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의 비서는 구조선을 준비한 후, 아펜젤러 선교사에게 옮겨 타길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타지 않았습니다. 배 아래에 아직 사회에서 꽃 피어보지도 못한 23명의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조선을 거부한 채, 배 아래로 들어가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려고 분투하시다가 결국 배와 함께 바다에 잠기며 순교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는 순교하셨지만, 그분의 순교의 꽃은 영원히 이 땅에 시들지 않을 것이며 지금도 많은 열매를 맺혀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죽었지만, 역사는 그를 기억하고, 그의 죽음을 기념하고 있었습니다. 군산은 그의 생명을 아끼는 마음을 여태껏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서천 동백교회 그의 순직기념관이 있습니다).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계속 세월호 사건과 중첩되고 비교가 됩니다. 어린 생명을 위해 구조선을 버린 선교사,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위해 구조선을 먼저 타려고 배와 어린 생명을 버린 그들… 너무나 다른 가치와 선택을 보며 가슴이 쓰라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