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은 여러 단계가 있다. 요한일서에는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요일 2:12-15)고 하여 신앙의 단계에 따라 구분한다. 그리고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고전 3:1-2)라고 하여 젖먹이 신자가 있음을 말해준다.
웨슬리에게 기독교는 곧 구원이요, 구원은 곧 성결(거룩)이었다. 따라서 성화는 여러 단계가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신 성도는 더욱 거룩해 질 수 있다. 여기서 성화의 단계는 서로 다른 종류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이다. 웨슬리안 학자들에 의하면 성화의 단계는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관계적 성화(Positional Sanctification)
누구나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전에 원수되었던 사이가 부자 관계로 회복된다. 이 때에 죄인이 하나님의 백성, 즉 거룩한 백성이 된다. 이는 객관적 변화이며, 내적 변화가 아닌 외적 관계의 변화이다.
믿음으로 죄인이 거룩해진다. 그러므로 신자가 된다는 말은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연결되며 거룩하다고 인정받는다. 웨슬리에 의하면 의인(Justification)이 바로 이 단계에 속한다. 의인은 죄인이 실제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 그는 용서받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그에게 전가(Imputed)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그에게 뒤집어 씌워졌다는 뜻에서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라고 한다.
관계적 성화는 의식적 성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구분된 물건이나 사람은 모두 거룩하다. 실제로 이들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이는 성별된 사물이나 사람이 거룩하다는 구약적 의미의 성결이다. 예를 들면, 성직자의 경우에 자신이 내적 변화 없이도 직업적인 종교인이 될 수 있다. 영적, 도덕적 변화가 없더라도 그가 성직에 종사한다는 의미에서는 분명 성직자이지만 관계적 성화만으로는 온전한 성화라고 볼 수 없기에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즉 믿고 용서받은 신자는 이제 실제적인 영적, 도덕적 변화를 받아야 한다.
루터(Martine Luther)의 ‘칭의’는 성화의 생활로 이어지기보다 교리화, 경직화된 경향을 보인다면, 웨슬리의 ‘성화’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 속에서 칭의 그리고 경건과 사회활동을 포괄하고 있다.
2) 초기의 성화(Initial Sanctification)
성별되었다는 것은 곧 영적생활의 시작이며 실제적인 변화를 동반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즉 의인에게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사건이 있는데, 곧 중생과 양자됨이다. 중생은 거듭남이며, 양자됨은 자녀됨이다.
성결은 도덕적, 영적으로 순결한 상태 혹은 모든 죄가 제거되고 하나님의 형상과 영을 소유한 영혼의 완전한 건강 상태를 말한다.
의인과 중생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이지만 논리적으로는 구분되는데 이는 용서받은 후에야 거듭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인(義認)은 죄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법적인 무죄선언일 뿐이며 실제로 의로워지는 내적, 영적 변화는 중생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순간 그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는 의인이 앞서지만 시간적으로는 동시적 사건으로 이 표현들은 한 사건의 다른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중생 이전과 이후를 어린아이의 출생으로 비유하여 설명한다. 중생은 생명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완전하고 독립된 사건이지만 성결의 관점에서는 시작이다. 웨슬리는 중생은 성화의 시작이요 문이라고 했다. 중생은 성화의 첫 단계, 시작이다. 이것이 초기 성화이다. 진정한 믿음을 가질 때 거듭나게 되며, 초기의 성화를 경험한다. 즉 죄의 용서를 받으며, 죄의 세력이 깨어지고, 성화(완전)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중생은 초기의 성화와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구분점은 새 창조와 완전으로의 시작이라는 관점의 차이이다. 이것은 태어나면 완전한 사람이지만, 성장의 첫 출발인 것과 같다. 한마디로, 요한 웨슬리의 “초기의 성화”란 사람이 거듭날 때 시작되는 성화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