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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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25일부터 3월 9일까지 2주 동안 목포에서 사경회가 개최되었다. 선교회에서 시행하는 사경회는 특별히 각 지역 교회의 대표적 일군들을 모아 집중적으로 성경 공부를 시키며 사역자로서의 리더십을 키우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목포 사경회는 호남의 전 스테이션 교회 지도자들이 한 장소에 모여 시행하는 대사경회로 이번이 3차 대회였다. 당시는 아직 광주와 순천이 있기 전이어서 3개 지역에서 모였다. 전주 25명, 군산에서 21명, 그리고 목포에서 29명 등 모두 75명이 참여하였다. 3개 반으로 나뉘어 진행하였는데, 상급반, 중급반, 그리고 아직 세례를 받지 아니한 예비 신자반이었다.
유진 벨을 비롯한 목포 현지 사역자들이 준비하며 운영에 수고를 하였다. 군산과 전주의 사역자인 전킨, 테이트, 해리슨 등이 강사로 함께 하였고, 오웬 선교사는 특별히 찬양반을 인도하였다. 오웬과 그 아내 조지아나 휘팅은 목청이 좋아 찬양을 은혜롭게 잘 부르기도 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의 면면을 통해, 필자는 한국 기독교의 성숙한 모습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다. 어떤 참석자는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아직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100마일 이상을 즐겁게 걸어왔고, 자신에게 해당하는 비용의 2/3를 지불한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며, 예비신자반에 속한 사람들은 비용 모두를 지불한다.
가장 활동적이고 가장 열성적인 사람은 김(윤수) 집사였다. 그는 목포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미셔너리’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는 목포를 방문하고 있는 23명의 형제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였다. 전킨은 말하기를, 목포에서 아무리 훌륭한 일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이 사람의 개종만큼 더 가치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프레스톤, 더 미셔너리, 1904년 11월).
목포에서의 큰 말씀잔치는 목포 교회는 물론 목포 선교부의 각 지회(Out-Station)에서 이제 갓 신앙을 갖게 된 이들도 함께하며 예수 생명의 은혜와 신자로서의 정체성과 리더십을 한층 고양시켰다. 변창연, 김윤수, 지원근, 마서규 등을 비롯한 목포와 전남의 초기 지도자들에게 하늘 은혜가 각별했고, 이들의 헌신과 충성이 고양되는 귀한 시간이었다. 이로써 선교사 자원은 물론 한국 일군들의 성장으로 이제 목포를 기점으로 더욱 더 전남 전역으로 복음을 확장하는 선한 물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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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불과 새 가정을 꾸린 유진 벨.
맨 위는 첫 부인에게서 낳은 헨리와 샬롯, 아래는 마가렛을 통해 낳은 윌리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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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묘약이 흐르는 군산
목포에서의 재기와 사역이 훌륭히 전개되면서 유진 벨 선교사는 재혼을 하게 되었다. 3년간의 홀아비 생활을 마감하게 한 그의 두 번째 아내는 마가렛 불이었다. 군산에서 사역하는 남동생 윌리엄 불 선교사의 사역을 격려하기 위해 멀리 조선을 찾아와 방문하고 있던 마가렛 양이 생각지도 않게 홀아비 유진 벨과 만나 교제하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함께 가정을 이룬 것이다. 군산은 참으로 사랑의 묘약이 흐르는 항구려나. 초기 호남 선교사들 가운데 미혼 남녀가 짝을 찾는 건 언제나 군산 바닷가였다. 데이비스와 해리슨, 윌리엄 불 부부, 오웬 부부 등이 한결같이 군산에서 데이트를 하고 결혼에 골인하였다. 이번엔 군산에서 새로운 커플이 추가 된 셈이다.
벨 선교사는 마가렛 불과 함께 미국에서 결혼식을 하기 위해 4월 1일 목포에서 출발하였다. 3년 전엔 아내를 잃고 비통함과 좌절 속에 아이들을 데리고 무겁게 건너간 태평양이었는데, 이젠 새 아가씨를 얻어 새로운 가정을 이룰 소망으로 훌쩍 넘었다.
5월 9일 두 사람은 버지니아주 노폭제이장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대서양 연안에 있는 미국 최대 해군 기지가 있는 노폭 도시의 제이장로교회는 레이놀즈와 마가렛의 남동생 윌리엄 불 선교사 출신 교회다. 이번에 마가렛이 결혼하여 남장로교 공식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면서 이 교회는 모두 세 명의 젊은이를 조선의 호남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유진 벨은 새 아내와 함께 켄터키에 있는 가정과 두 자녀 헨리와 벨을 만나고 재차 한국으로 돌아와 목포에 8월 도착하였다.
마가렛(Mrs. Bell, Margaret Whitaker Bull, 1873~1919)은 버지니아주 노폭(Norfolk)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유진 벨과 결혼하고 미남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받아 함께 조선 목포에 부임하였다. 그해 12월 벨과 함께 광주로 전임하여 전도자요 교육자로 헌신하였다. 1919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하였으며, 그녀의 묘는 광주 양림동 선교동산에 있다.
벨이 재혼식을 위해 미국에 다녀오는 동안 광주에서는 김윤수가 텃밭 작업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지난 2월에 선교 회의 결정에 의해 광주 선교부 책임자 역할도 맡은 유진 벨은 광주 선교부지 매입과 사택 건축 등 준비 일체를 김윤수 집사에게 맡겨 놓았던 터였다. 김윤수는 4월부터 먼저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광주로 이사 와서 유진 벨과 오웬이 광주에 도착하는 즉시 사역이 이뤄질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조성하고 있었다.
목포 교회가 더욱 활성화되고 광주 선교 개설을 준비하며 유진 벨이 재혼을 하는 기쁨이 있었던 1904년의 한반도는 외세에 의해 격랑에 휩싸이고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 일대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다 마침내 전쟁까지 벌렸다. 2월부터 시작한 전쟁은 이듬해 1905년 가을까지 벌어졌다. 무장한 외국 군대가 우리의 영토 내에 들어와 무참히도 짓밟고 지나가며 피비린 전쟁을 치루는 동안, 전란의 화에서 많이 비켜나 있던 지역인 목포와 전남에서는 새로운 사역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봄부터 시작한 김윤수 집사의 열심은 마침내 12월 중순,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출 수 있었고, 잔뜩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던 선교사들은 마침내 광주로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1904년 12월 19일, 유진 벨 부부와 오웬 부부 4명의 선교사는 일군들과 함께 짐을 배에 싣고 영산강을 거슬러 목포에서 나주로 갔다. 다음날 20일 영산포에 도착하였고, 일군들의 도움을 얻어 그날로 김윤수가 준비한 광주 센터에 도착하였다.
놀란 선교사는 저희와 함께 기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대단히 좋아합니다. 요리에 있어서 장모님이 아내보다 더 나은 것은 특별히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분이 계신 것은 아내와 저 두 사람에게 도움이 됩니다.
저는 목포 선교부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제게 실로 많은 일이 던져져 있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예배를 인도하고 있으며, 가르치고 찬양하는 일을 위해 한 주일에 두 번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모임의 리더를 개인적으로 지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매달 정기적으로 남쪽으로 여행하면서 두 곳의 외지 모임을 방문하려고 합니다. 최근에는 바람이 몹시 불고 파도가 높아 가지 못했습니다(프레스톤, 1904년 12월 31일).
유진 벨과 오웬이 광주로 떠난 목포의 새 책임자는 프레스톤이 이었다. 목포에는 프레스톤 부부, 스트래퍼, 그리고 두 달 전에 새로 부임한 놀란 선교사가 있었다. 선배들이 남기고 간 목포에서 맞는 성탄절을 맞은 프레스톤과 놀란 선교사, 그들은 목포 교인들과 함께 축하하며 아이들과 복된 성탄의 기쁨을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