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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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열네 차례에 걸쳐 사도신경에 담긴 기독교 핵심 교리를 석의(釋義)하였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를 간결, 명료하게 진술한 고백서이다. 이 신경은 시대와 연령과 교육 수준을 넘어 어느 곳 어느 누구에게나 의미와 가치를 전달해 줄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초적 교리서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신앙고백을 잃어버린 교회와도 같다. 교회에서 사도신경이 예배에서 배제 무시되고 있고, 설령 예배 중 사도신경을 고백한다 해도 그 의미와 중요성이 제대로 강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초대 교회의 선조들이 세례자 교육 및 예배 시의 사용과 더불어 발전되고 강조된 반면, 오늘 날에는 더 이상 신경이 지시하고 있는 신앙적 및 신학적 동의가 많은 부분에서 포기되고 부인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3년 여에 걸쳐 온 세계 질서를 바꿔버린 코로나 19 팬데믹 이후 예외 없이 교회도 큰 변혁기를 거치고 있다.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제자 훈련, 성경공부 교육, 전도 훈련 등 많은 교육 프로그램 운용도 유보 상태이고, 과거의 교회가 했던 것처럼 교리 교육이나 요리문답 교육은 거의 위축 상태이다. 한 사람의 교인이 세워지기까지 어떤 교회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교회 교육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이해가 상당 부분 불투명해짐으로써 많은 교회들이 결국은 자기 중심적 교인을 양산해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문제는 비단 한국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 선교사가 파송된 피선교지에까지 동일한 문제가 적용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른 바 열린 예배(구도자를 위한 집회), 최영기 목사의 가정교회가 한국에 상륙하면서 전통적인 개혁 교회 예배를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신경(信經) 사용을 거부하는 교회가 미국의 침례교회이다. 척 스미스, 릭 워렌, 빌 하이벨스, 조엘 오스틴, 최영기 등이 침례교회 목사들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에 관한 것으로 가득차야 하기에 사람이 만든 신경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단이 아니더라도 침례교회가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서 우러나왔다 하더라도 사도들이 성경에서 추출한 교리를 거부한다는 것은 극단적인 태도임에 틀림없다. 이 잣대를 들이대면 예배 순서 중 남게 되는 것은 ‘성경 봉독’ 뿐이지 않겠는가? 기도, 찬송(찬양), 강설, 헌상 등은 모두가 인간이 만들고 행함인 것이므로 이들에 대해서도 적용해야 형평성이 맞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시교독(송)은 성전과 회당 예배에서, 신경은 초대 교회에서부터 전수되어온 아름다운 예배 전통으로 빛났으며, 건전한 교리를 통해 창출되는 경외감은 성도들의 심령을 충만케 하는 예배로 이끌었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온다. 성경은 우리가 믿어야 할 바를 집대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서 교리를 찾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물론 교리(Doctrine)와 교의(Dogma)는 구별된다. 교의는 교리에서 파생되었고, 교의는 각 시대의 교회가 각종 이단 사조에 대항하여 불변하는 기독교 교리를 새롭게 고백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의는, 그리고 교의를 명문화한 신경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 각 시대 교회의 신실한 고백이다.
기독교 신앙은 마음으로 믿고 내면적으로 확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외적으로 입으로, 삶으로 시인해야 한다. 여기 ‘시인하다’(호모로게오,ὁμολοɼέω)란 ‘공개적인 고백’을 뜻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로마서 10장 9-10절에서 입으로 하는 고백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신약 교회의 기초가 된 사도들의 신앙고백에서 기초하여 작성된 신경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전술한 바 있거니와 이 신경은 삼위일체 구조, 즉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성부 하나님께는 창조와 섭리를 고백한다. ▲성자 하나님께는 동정녀 탄생, 십자가와 고난, 음부 강하, 부활, 승천,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 좌정,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심을 고백한다. ▲성령 하나님께는 ‘성령을 믿음으로’ 거룩한 공교회, 성도의 교제, 죄 용서, 육신의 부활, 영생을 누리게 하신다고 고백한다. 최근에 한국 교회는 사도신경을 새롭게 번역했다. 이 새 번역의 가장 큰 기여는 기존의 신경이 서술형으로 번역되어 확실한 의미 전달이 약한 점에 비해 새 고백서는 삼위일체 구조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라틴어의 원문에 따라 삼위의 각 위를 ‘나는 믿습니다’라고 세 번에 걸쳐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번역에 미흡한 점도 있다. ‘아버지 하나님’, ‘본디오 빌라도에게’. ‘몸의 부활’이라는 오역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 원문은 ‘아버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그 하나님이 나의 생사회복을 주관하시며, 내 몸과 영혼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공급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31)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셨음을 믿는다고 하면서 막상 자신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 하나님이 전혀 관계하지 않는 듯이 생활하는 것은 창조 신앙이 없다는 뜻이다.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과 그것이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바라보면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거든 하물며”(마6:28-30),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하실까를 생각하고 믿는 이가 창조 신앙을 가진 자요,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셨기에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는 신앙인 것이다(마6:25-31). 또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고난’(suffering)이었다. 영광의 주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죄의 세력과 권세에서 풀어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인의 자리에 서시어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도신경은 결정적인 재판 과정에서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만 고난을 받으신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세상 재판관들에게 공적으로 재판을 받으셨다. 그런 뜻에서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또는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라고 의역해야 옳은 고백이 된다.
끝으로 필자는 예배에서의 신앙고백은 공교회적인 전통이다,라는 점을 확실히 심어주고 싶다.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해 초대 교회가 이미 다양한 신앙고백을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3-8절, 빌립보서 2장 5-11절, 계5:9-13절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고백하고,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찬송한 것이 초대 교회의 예배 속에 자리 잡았음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교회는 처음부터 ‘고백하는 교회’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배에는 고백하는 요소가 포함되는 것은 마땅하다.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을 위한 시간이다. 예배자를 초청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헬라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εω,요4:20,23,24;행24:11)는 경외심을 가지고 “(~앞에)나아가 무릎을 꿇다.” “(~에게 절하며)경의를 표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무념무상으로 종교의식에 나를 맡기거나 외적으로 거룩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의 이끄심에 경외로움으로 응답하여 그분께 나아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높이고 경배하는 의식이 예배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예배의 요소와 순서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이 왜 부르셨으며, 부르신 그 은혜에 어떻게 응답하며, 삼위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가를 하나의 분명한 논리와 흐름을 가지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과 예배자 간의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가 ‘자기 고백’의 시간과 ‘사도신경’의 고백이다. 따라서 삼위 하나님을 향한 첫 사랑을 잃지 않는 상태로 계속해서 유의미하게 고백을 한다면 우리의 예배가 가장 활력이 넘치는 예배가 될 것이며, 이단의 준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혹도 능히 극복하는 삶의 예배자로서 세상을 능히 이기는 산 예배로 충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