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
|
1904년 12월 25일, 성탄절 아침 11시에 광주에서의 첫 공식 예배가 드려졌다. 광주 유진 벨 임시 사택에서 가진 예배는 약 200여명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대부분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두 개의 큰 방에 각각 남녀별로 20여명씩 40여명이 집 안에 들어와 앉아서 예배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마당과 집 바깥에 둘러서서 예배 광경을 함께 지켜 봤다.
이 도시(광주)에서의 첫 교회 예배는 1904년 눈 오는 크리스마스 날에 벨의 임시 거처에서 드리게 되었다. 식당의 의자를 구석으로 옮기고 의자들은 침실에 높이 쌓아 놓았다. 예배의 시작을 알리고 선교사들은 누가 나타날지 모르는 기대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한국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긴 줄을 지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기쁘고 놀랐다. 그들은 선교사들이 가져온 큰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는 지 보려고 왔었다. 그러나 어떻든 그들은 왔다! 여인들은 한 방에 앉고 남자들은 다른 방에 앉았다. 그리고 벨 목사는 그 사이에 서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복음 소식을 전했다(톰슨 브라운, “한국 선교 이야기”).
유진 벨 선교사는 문간에 서서 예배를 인도하였고 설교하였다. 그는 이 땅에 하늘의 평화가 내려왔고,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에게 넘친다고 설교하였다. 광주에서 첫 예배를 드린 이가 200여명이라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신자는 몇 사람일 뿐이고,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아직 호기심과 단순 구경꾼에 불과한 정도였다. 외국인 선교사는 벨과 아내 마가렛, 오웬과 아내 휘팅 4사람과 오웬 부부의 어린 두 딸이 있었다. 한국인은 세례 교인이 3명 있었다는 보고를 참고하면, 그들은 김윤수, 변창연, 그리고 요리사 서명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목포에서부터 이미 신자로 일군으로 일하였던 이들이 각기 아내와 자녀들도 있었을테고, 아내들도 수세자임은 분명할텐데, 아마 보고서엔 남자들만 기록한 듯하다. 나머지 광주 토박이들은 대다수 아직 신자라고 보긴 어려웠다.
그럼에도 첫 예배드리는 광주 모임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찾아온 것은 의미 깊다. 6년 전 1898년 유진 벨이 인도하던 목포에서의 첫 예배도, 그리고 여타 지역의 대부분 첫 교회 첫 예배는 한 두명이거나 수 명일텐데, 광주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의외일 수도 있지만 상당히 고무적이다. 이날을 위해 준비하는 상당한 기간에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일들이 많았고, 직접적인 전도 활동도 나름대로 있어 왔던 터였다.
1904년 봄부터 김윤수는 선교회와 유진 벨의 지시에 의해 광주 양림동에서 부지를 매입하고 사택 건축 일을 1년 내내 해 왔었다. 가족과 함께 이곳에 이주하여 선교 센터 마련에 노력하였다. 땅을 사고 건축 자재를 구입하여 집을 지으면서 광주의 여러 인력들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공사를 하면서 김윤수는 틈나는 대로 복음을 전했으리라.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다량의 자재들과 큰 주택을 짓는 것을 보고 고용된 일군들은 물론 그것을 지켜보는 구경꾼들도 호기심 속에 늘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8월에 새 신부 마가렛과 함께 목포에 다시 온 유진 벨은 이내 가을부터 여러번 광주에 올라와 직접 광주 스테이션 진척 상황을 점검하기도 하고, 김윤수와 함께 사람들에게 전도 활동도 펼쳤었다.
12월 20일, 벨과 오웬이 광주로 이사 오면서 여러 짐을 일군을 고용하여 새 거처에 옮기고 하는 모든 과정들이 여러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이들의 소문과 소문으로 광주 일대 호기심 많은 이들의 기대도 이미 컸다. 불과 5일 만에 드리는 12월 25일 예배였지만, 이미 여러 정황과 노력들이 있어 와서 많은 광주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유진 벨은 광주에서의 첫 예배를 드리고 광주 교회를 시작하였다.
지난 가을 동안에 나는 목포와 거주할 집이 마련되지 않았던 광주에서 전도 사역에 모든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우리의 새 선교지구에 정착한 후에 우리는 광주지역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전도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광주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지난 한 해 동안 만 장의 전도지와 달력을 판매하거나 배포하였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백 권, 찬송가는 백 오십 권을 팔았다.
나는 시장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정기 주일예배에서 설교했다. 예배때마다 많은 사람들로 우리 집이 가득 메워졌고, 집안 뜰 현관까지 채워졌다. 나는 지금 정기 주일예배를 드릴 교회가 없어서 매우 불편하며, 새로운 교회 공간을 확보할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내게 위임된 선교 건물을 건축하는 일을 실제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나는 지방 전도사역에 가능한 모든 시간을 사용하고자 했다. 2월에서 3월까지는 세례 받기를 원하는 183명의 신청자들에 대한 문답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매우 만족스러운 선교여행이 되었다. 나는 각 선교지역의 지도자들이 성경공부반에 참여하도록 광주로 초대하였다. 그 중 30명이 오기를 희망했고, 오웬 의사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성경공부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성경공부반을 통해서 나는 유능한 한국인 교회지도자를 선발하고 훈련시키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유진 벨, 1905년 보고서).
광주 교회를 시작하면서 유진 벨은 계속해서 전도에 박차를 가했다. 오웬과 함께 시내는 물론 광주 인근의 농촌 지역에도 순회하며 설교하고 세례 문답을 행하였다. 1904년 가을부터 열심내어 광주 교회를 세우고 1905년 봄 들어서도 계속된 그의 열정적인 사역과 헌신으로 지난 1년 만에도 상당한 구령의 열매가 거둬졌다. 광주내 전도는 물론 인근의 농촌 지역에까지 선교 여행을 통해 설교하며 문답하기도 하였다. 지역 공동체 모임의 활성과 함께 광주 교회도 점차 신자가 늘면서 크고 넓은 예배당이 절실했다. 유진 벨 집을 예배 공간으로 이용하는 일은 너무도 협소하였다. 유진 벨과 오웬 등의 선교 사택이 제대로 갖춰져야 했고, 또한 독자적인 예배당 건물도 지어야 했다.
|
기역자 형태의 광주 북문안교회당 |
기역자, 북문안 교회
벨과 오웬의 정규 사택을 짓는 공사가 1905년 5월부터 시작되었다. 1904년 김윤수가 마련하여 지금까지 예배 공간과 함께 써 온 집은 임시 사택일 뿐이었다. 11월 경 보다 좋고 제대로 된 집을 완공하여 가족들이 새 거처로 옮겼다. 그들이 떠난 임시 사택은 독자적 예배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었는데, 그동안에도 신자가 계속 늘어 더 넓은 예배당도 짓게 되었다.
광주 읍성 4대문 가운데 북문의 안 쪽에 부지를 얻어 공사를 하였고, 이듬해 1906년 5월 완공하였다. 50평 규모로 기역자 형태로 지었으며, 지역적 특징을 따라서 북문안교회로 불리었다. 이때 당시 50명에서 70명을 넘는 성도가 출석하였다. 벨과 오웬 선교사 외에 1905년 11월부터 목포에서 합류한 프레스톤과 놀란 선교사도 있었다. 기존의 한국인 지도자들인 김윤수, 변창연, 지원근 외에 새롭게 광주의 젊은 일군들이 더하여지고 세워져 갔다.
유진 벨 선교사는 광주 교회 1대 담임목사로서 교회를 목양하며 성도와 지도자들을 세우고 보다 폭넓은 하늘 사역을 꿈꾸었다. 이제 참으로 광주는 빛의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하늘 빛으로 채색된 공간에서 목포와 광주에 이어 이제 동부권 순천 지역을 포함하여 더 넓은 곳에 빛의 통로가 되어야 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전라도 벌판 곳곳에 하늘 은혜 풍성하도록 유진 벨은 소원하며 전남 기독교 개척자요 일군으로서의 사명을 힘있게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