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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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선생님이 학교 교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일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23년 7월 18일 아침, 서울 서초구의 서이초등학교 1학년 6반에서다. 그 죽음의 까닭을 놓고 후유증은 한 달이 지났어도 계속되고 있고 여전히 파장은 크다. 당사자는 그 반 담임 여 선생님으로 교직 생활 2년 차에 들어선 스물세 살의 꽃다운 나이에 꿈도 컸을 터인데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쌓이고 쌓였기에 그 꿈도 접고 극단적인 결단을 택해야만 했을까? 타살 정황은 없었는데 담임 선생님은 그간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려 왔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그간 쌓여온 ‘교권 침해 문제’(敎權侵害問題) 논의에 본격적인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그녀가 미래 세대를 책임질 어린이의 훌륭한 선생님이 되겠다는 뜻을 세우고 교육대학교의 전 과정을 마칠 때까지, 그리고 짧지만 교생 실습을 경험하면서 사도(師道)의 고귀한 소명(召命)에 응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며 갈고 닦았을까, 단편적인 보도와 글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그 어려운 임용시험을 거쳐 수도 서울의 강남권에 초임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첫 부임한 교육 현장은 그녀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유형무형의 환경들이 펼쳐져 있었기에 그녀의 일기장에 “힘들다”는 단어가 무거운 바윗덩어리가 되어 한(恨)서린 생을 마감하게 하였다.
교육(敎育)을 영어로 education, 불어로 éducation이라 한다. 어원은 라틴어 ‘어듀카레’(educare)로서 “끄집어 낸다”, “이끌어 낸다”는 뜻으로, 교육이란 인간이 가진 성질을 발굴하며 그 잠재력을 인성과 함께 밖으로 나오도록 발전시켜 충분한 신뢰와 자기 확신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말한다. 교육자의 진정한 소명(召命,Calling)은 풍요의 산파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소명감에서인지 선생님은 발령을 받고 첫 출근부터 아침 7시 30분이면 정확히 등교하였다고 한다. <교사로서의 자세와 위치>를 지키며 미래 세대들이 국가와 인류 사회를 위하여 꼭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지(知)·정(情)·의(意)의 균형 잡힌 성장 발달에 기본을 둔 반듯한 교사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초심을 가졌었다는 것은 그녀의 모교 은사(교수)들이 거리로 나와 진상규명을 촉구했던 발언들 중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인구 감소로 폐교 직전이거나 변방의 학교보다 모든 조건이 월등히 갖춰진, 그리고 부(富)와 권력(權力) 집단의 상징으로 인식된 서초구에 소재한 학교이므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다방면에 경륜을 쌓기에 좋은 교육 환경이라는 기대감도 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상(理想)과 꿈(vision)은 부임하면서 깨지기 시작하였다. 학습 현장은 끝이 없는 경쟁의 터,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가 되어 있었다. 특히 2023학년도 1학기에 1학년 6반 담임을 맡으면서 교육과정(curriculum), 교과서(text book), 지도안(指導案,lesson-plan), 일과표(program time table)의 완벽한 준비로 가르침에 임하는 교육 현장(교실)은 전혀 다른 환경으로 말미암아 맥이 끊기기 일쑤였다. “최근 학교 생활이 어떠냐?”는 선배 동료 교사들의 물음에 “그냥 작년보다 열 배는 힘들어요”라고 답할 뿐이었다는 이야기도 보도되었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된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 자녀들의 희소가치는 대단하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 인권’을 앞세운 철저히 이기적인 학부모들의 ‘교권침해’(敎權侵害)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심각한 수준의 민원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천민 자본주의의 졸부(猝富)답게 ‘자아과시증후군(自我誇示症候群)’에 ‘갑질 바이러스’까지 감염된 학부모의 반교육적 행태와 언어 폭력에 공분이 쌓여있던 초·중·고 교사들이 그 여 선생님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어 서울 광화문에 집결, 교권 회복을 외치게 된 것이 그 증거이다. 예를 들어 1학년 선생님들끼리 너무도 힘들고 억울해서 서로 하소연하는 자리에서도 6반 선생님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고 한다. 그 학급은 1학기에만 담임 교체가 두 번이나 있었는데, 그런데 아뿔사, 선생님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한 주 전, 그 학급에서 학생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앞 자리에 앉은 A 학생이 뒷 자리에 앉은 B 학생의 이마를 연필로 긁은, 이른바 연필 사건이다. 그 이유는 한 여학생 부모가 담임 교사를 지나칠 정도로 괴롭혔기 때문이란다. 사실 서초, 강남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명퇴 교사가 많고, 타 지역으로부터 교사 유입이 적은 것은 바로 학부모들의 극한 민원으로 인한 고충이 크기 때문이란다. 이에 A 학생의 학부모가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교사 자격이 없다”, “애들 케어를 어떻게 하는 거냐?” 등 매우 거친 말로 강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피해 학생 측이나 가해 학생 측 학부모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위축될 대로 위축된 상태에다가, 상급 기관의 호출 등으로 출구를 찾지 못한 선생님은 교실 한 켠의 공간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8일 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하루가 지난 19일에야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였다는데, 그렇다면 하루 동안 입막음이 진행되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학부모가 언론사와 지속적으로 접촉했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떠돌았다는 이야기 역시 왜곡된 ‘권력’이 현실 사회를 유린하고 있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 준다. 어느 언론에 따르면 서이초등학교 학부모 가운데는 변호사를 비롯한 법률 계통의 직업을 가진 전문인들이 다수라는 기사를 보았다. 아마 서초구 내에 각급 법원과 검찰청 등이 집중되어 있고, 이들과 유관한 업종들이 밀집해 있어 초·중·고 학생의 가족 중 그 권력을 과시하는 학부모군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리라. A 학생 엄마는 경찰 간부, 아빠는 검찰 수사관이라는 신분도 뜬다.
아바크 족을 아시는가? 성경 창세기 32장 24절에 나오는 야곱의 씨름 사건에서 이 ‘씨름’의 헬라어 단어가 ‘아바크’(abak)이다. 이 말의 뜻은 “씨름하는 당사자들이 서로 먼지를 뒤집어쓰다”이다. 그래서 아바크는 일종의 전투와 같고 싸움과 같은 승부수를 말한다. 그런데 현대판 아바크 족은 씨름의 룰도, 공정도, 상식도 불필요하다. 스포츠맨십도 연대감이라는 신사도도 없다. 고등교육을 받았든 안 받았든, 일단은 신분 과시에 목숨을 건다. 교사는 학생의 스승이다. 하지만 그러한 속물들의 안중에 교사는 ‘노비’ 쯤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맘 카페 <강남 엄마 목동 엄마>에는 해당 A 학생 학부모가 평소 ‘딸이 화장실 가는 거 수시로 체크해 알려라’, ‘자리는 어디에 앉혀라’, ‘내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느냐?’ 등 고인이 된 선생님을 밀레니엄 하녀 수준으로 괴롭혔고, A 학생과 B 학생 사이의 학폭 문제로 양쪽 부모에게 시달리다가 교육청 장학사로부터 호출을 받아 호된 꾸지람을 들은 다음날 아침 학교에 출근하여 생을 마쳤다는 슬픈 사건이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 교육계에 “스승의 존경심은 사라졌다.” 오죽하면 전국의 초·중·고 교사들이 주말이면 광화문과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하여 ‘교권 회복’을 외치겠는가!
버겁지만 사도(師道)의 존엄성을 높여야 나라의 교육이 산다. 필자가 중등 교사로 교단에 섰던 60년대 전·후만 하더라도 사도(師道)는 살아 있었다.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그리고 정보화 사회로 급변하면서 “내가 곧 신(神)이다”라는 물질적 부(富)와 탐욕(貪慾)의 맘몬(Mammon)을 절대화하는 비인간화 사회로 변질되면서 돈과 권력에 따른 계급 사회가 형성되면서 교육열은 높아졌으나 인간 본연의 인성을 잃어버렸다. 돈과 권력에 정비례하여 자녀들의 공교육 앞에서의 학부모들의 심리 상태는 마치 귀신들린 거라사 광인(狂人)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 모습을 연상케 한다 (눅 8:26-29).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도덕법(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귀신들린 거라사인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실상을 보여 준다. 귀신은 인간에게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국회 청문회 등에서 뻔뻔스런 공직자들에게서 느끼는 그대로이다. 폭력이 일상화된 오늘날의 사회를 보라. 이제 학교마저 안전 지대가 아니다. 학교 성적에 대한 경쟁에서 낙오되면, 곧 사회적 낙오자가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학부모나 학생들은 출구 없는 경쟁에 목을 메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학생들은 사람이 평화롭게 살려면 사회 규범을 지키고 서로 용납하는 가운데 이웃에게 선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회 규범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양심의 법마저 어기고 친구들을 괴롭히고 폭력을 가해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로 인한 학교로부터 제재를 당하면 선생님은 학부모의 먹이사슬이 되는 것이 대한민국 공교육의 현장 모습이다. 여 선생님의 죽음이 바로 이를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은 백년 대계(百年大計), 곧 “백년의 약속이다.” 먼 미래를 위해 백년의 시간을 준비하고 추진하는 긴 과정이 교육의 근본 정신이다.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이 잘 연계되고 조화를 이루어 가정에서는 스승을 존경하도록 가르치고, 학교에서는 부모님을 공경하며 인류를 차별 없이 사랑하도록 가르칠 때, 지식 더하기 인성 교육(人性敎育)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학교 교실은 학부모들에 의해 황폐화되었다. 제도에 의한 학생 지도는 학부모의 사회적 권력이 이를 무력화(無力化) 시켜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교사는 언어 폭력, 겁박, 회유 등으로 지쳐버린다. 이에 더하여 “뒤틀린 공감”의 위력이다. 공감은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주요한 수단이다. 기쁜 일, 슬픈 일, 분노하는 일에 서로 공감하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결속을 다지는 기반이 된다. 공감은 서로가 집단의 소속감을 갖기 위한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성장기 아이들이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공감은 특히 중요하다. 공감을 표현하는 감성지수를 EQ로 표현하고 IQ는 상대적인 능력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형성되지 않고, 뒤틀린 데로 형성됨으로써 심각한 갈등과 문제를 일으킨다. 집단 따돌림도, 만성적 악플도, 집단적 혐오 표현도 모두 가해자 집단 내에서의 강한 공감으로 작용하는 ‘갑질’ 사회악이 되는 것이다.
서이초등학교 여 선생님의 죽음 이후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교사들의 집회>가 주말마다 광화문에서 모이다가 8월 19일 다섯 번째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역 앞으로 옮겨 교권 회복과 법 개정을 요구하였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초·중·고등학교 교장 803명도 “위기에 빠진 교육 현장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법제도 개혁에 함께 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황폐화된 교실이 법 개정과 제도 개선으로만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일상 회복만으로는 너무도 부족하다. 더 근본적인 것은 뒤틀린 인간성의 회복이다. 거라사 광인이 어떻게 정상인이 되었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이 그를 정상인으로 회복시키셨다 (눅 8:29, 35, 39). 돈과 권력으로 모든 것을 얻고 성취한다는 학부모의 뒤틀리고 저급한 의식에서 깨어나 민주 시민으로서 교육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높이는 한편, 교사는 공정하고 따뜻한 가르침으로 몸과 마음의 건강 회복이 우선되어야 교실의 학습은 정상화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선의의 경쟁, 이해 깊은 공존, 창의적인 교육 혁명만이 대한민국의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