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웨슬리는 점진적인 성화에 순간적인 단계의 성화를 밀착시키는 데는 두 가지의 순간적인 체험이 있다.
첫째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초기의 성화이며, 둘째는 그 후에 오는 또 하나의 순간적인 체험 곧 온전한 성화이다. 전자가 불신자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얻는 순간적인 체험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신자가 다시 자기의 무능과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에 대해 깨닫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 체험이다.
이 체험을 웨슬리는 ‘제2의 축복’(Second Blessing), “온전한 구원”(Full Salvation), “기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온전한 사랑”, “순수한 사랑”으로도 불렀으며, 이 사랑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화론은 웨슬리 신학의 중심이요, 그의 목회와 설교의 중심적인 교리였다.
온전한 성화가 순간적이냐 점진적이냐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불확실했으나 45년간의 목회관에 의해 순간적이라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온전한 성화의 경험을 고백하는 이들은 거듭난 후에 2차적인 순간적 체험을 간증하였다. 따라서 웨슬리는 온전한 성화는 언제나는 아니지만 대부분 순간적인 역사(Commonly, if not always)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중생의 순간부터 성화의 역사가 시작되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는 만큼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되며, 이런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모든 죄로부터의 정결함을 받으며(소극적 성화), 성령의 역사로 순수한 사람의 충만(적극적 성화)를 얻는다. 비록 온전한 성화에 도달하지 못한 기독교인이라도 지옥 불에 떨어지진 않겠지만 하나님의 부름과 용서와 거듭나게 하신 목적이 곧 성화이기에 신앙의 목표는 곧 성화이어야 한다.
요약하면 이 성화는 초기 성화에서 온전한 성화로 성장하는 과정 중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성령충만)로 온전히 성결해진다. 이 온전한 성화는 곧 사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이웃)을 향해 점점 확장되어야 한다. 이 사랑이 보다 역동적인 활동을 통해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더 넓은 세계로 실천될 때 더욱 하나님 나라는 확장된다.
5) 영화(Glorification)
영화는 기독자 완전이나 온전한 성화, 성결은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개념상의 차이는 있다. 대체로 구분하면 성화는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 과정을 의미하여 체험적인 의미가 강하며, 성결은 온전한 성화의 경험을 통해 정결하게 된 결과적 상태를 뜻하며 기독자 완전은 신앙인의 인격적 성숙을 주로 의미한다.
린드스트룀(Lindström)은 기독자의 완전이란 인격의 완전이며 이는 곧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개념상의 차이(즉, 성화는 과정, 성결은 결과)로 볼 때 그리스도인은 온전한 성화의 경험을 통해 성결케 되어 기독자 완전의 보다 높은 정도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세에서의 완전이 끝이 아니다. 현세에서 완전한 자라도 계속 은혜 안에서 성장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최종적인 의인을 얻어야 한다. 이를 최종적인 완전(Final Stage of Perfection) 또는 영화라고 한다.
이 영화의 단계에 들어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사단과 자기 육신과의 영적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상 최근에 재발견된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어거스틴이나 종교개혁자들과 비견하여도 좋을 만큼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 은총의 신학자 이다. 그가 이러한 은총의 신학자임을 우리는 그가 성화론(Sanctification theory)을 중심으로 구원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데에서도 분명히 드러낸다.
웨슬리는 성화론을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현재 여기에서”(Here and Now) 얼마나 깊이 역사하느냐 하는 것을 어느 종교 개혁자보다도 명백하게 통찰하였다. 구원은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전자를 의인(Justification)이라 하고, 후자는 성화(Sanctification)로 구분하여 취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