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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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 선교사는 오웬과 함께 광주에서의 복음 전파와 교회 개척을 성공적으로 시작하였고, 여러 채의 사택 건축을 하면서 새롭게 합류한 놀란 의사로 하여 광주에서의 진료 사역도 전개하였다. 오웬 부부는 의사였지만, 오웬은 복음 전도 사역에 매진하였고, 휘팅은 연이은 출산과 양육으로 환자를 돌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1905년 11월 20일, 놀란 선교사는 자신의 집(1년 전부터 당시까지 광주의 예배처소를 겸하였던 임시 사택)에서 9명의 환자를 진료하며 광주 병원을 열었다. 1904년 내한 사역한 놀란 의사는 처음에는 목포에서 오웬에 이어 진료 사역하였다. 1년 지나 1905년 11월, 선교회에서 목포 사역보다는 광주 선교에 집중하기 위해 프레스톤과 놀란을 광주로 전임시켰다. 프레스톤은 광주에 정주하면서 목포 교회를 순회하는 식으로 돌봤고, 놀란은 아예 광주 의료 사역만 책임졌다.
진료소가 붐빌 정도로 날마다 슬픔, 질병, 육신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모습들을 가지고 찾아 오는 방문객이 많이 증가하였다. 지체장애, 시각장애, 불구자 그리고 전반적으로 모든 질병으로 고통 받는 많은 이들이 기독교 진료소로 치료받기 위해 왔다. 그들의 문제들은 설비들을 최대한 이용하여 보살펴졌고, 진료소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고 슬픔에 찬 영혼들을 위대하신 의사(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으로 모든 전도의 형태가 강조되었다.
의료 사역은 이 지역에서 처음 맞는 일이므로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급속도로 대중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70마일 지경 안에 한 부락이 있을까 말까한데 그마저도 질병에 대처할 것이 갖춰져 있지 않다. 그리고 많은 환자들이 더 먼 지역과 반도의 남쪽 근방에 있는 많은 섬들로부터 오는데, 그곳들은 모두 장래를 생각할 때 낙관적인 조건들을 갖췄다. 시설은 개소한 지 6개월 반 만에 2,464명의 환자들을 돌보았고 26번의 주요 수술과 많은 작은 수술들이 행해졌으며 152번의 왕진이 이루어졌다(1906년 제 15차 연례회의보고서, “호남교회춘추” 재인용).
하지만 그는 오래가지 못했다. 만 2년이 채 안 돼 평북 운산의 금광회사로 전직하였다. 단지 높은 임금을 받고 싶었는 지, 아니면 그곳에서도 얼마든지 선교적 관점에서 일하였는 지는 알 수 없으나, 동료 선교사들은 마치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가버린 데마에 비유할 정도로 그의 선교 사임과 이직은 아쉬움을 남겼다. 게다가 1년 전 1906년 5월에 안식년으로 미국에 간 스트래퍼 선교사도 사직을 하고 다시 광주에 복귀하지 않은 것 등이 1907년 목포와 광주 선교에 있어선 어려움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1907년, 가버린 이도 있었지만 새로 들어오는 이는 갑절에 갑절이나 더 많았다. 처음 7인의 선발대 이후, 한 두 명씩 들어오던 후배들이 15년이 지난 1907년 봄부터 이듬해 1908년 봄 사이에 무려 13명이나 보충되었다. 니스벳과 낙스 두 목사는 아내와 함께였고, 나머지 9명은 독신자들로 남자는 맥칼리, 버드맨, 윌슨, 여자는 랭킨, 코델, 다사이트, 엘라 그래햄, 낙스, 피셔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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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초기 의료사역을 했던 윌슨 사택(양림동 현존) |
백성을 구제하라
이 가운데 엘라 그래함 선교사는 스트래퍼 선교사의 공백을 메웠고, 윌슨 선교사는 놀란의 공백을 메워 광주 병원의 2대 책임자가 되었다. 윌슨(우월손/우일선, 1880~1963)은 아칸소주 컬럼버스에서 출생하였다. 워싱턴대 의과대학과 뉴욕 화이트 성서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와 의사로서 1908년 3월 내한 광주에 부임하였다. 광주 제중원 2대 원장으로, 광주 나병원에 이은 여수 애양원을 설립하고 1940년까지 사역하였다.
윌슨 선교사는 광주에서 사역하던 중 목포에서 사역하던 간호사 베시 낙스와 1909년 10월 결혼하였고, 모두 7명의 자녀를 낳았다. 7남매 가운데 세 사람은 부모에 이어 2대째 호남에서 선교 헌신하였다. 윌슨은 1948년 은퇴하여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거주하다 1963년 노스캐롤라이나 그린스보로에서 별세하였고, 그의 묘는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있다.
광주 양림동산에는 옛 선교사들의 사택이 여러 채 남아 있는데, 1920년대에 윌슨이 건축하고 살았던 멋진 집도 잘 보존되어 있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된 것으로 우일선 사택이라 불리며, 광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다.
이만열 선생은 그의 책 “한국 기독교 의료사”에서 윌슨이 1910년 당시 진료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내한하여 3년차되는 1910년엔 9,900명을 진료했고 수술은 175건, 이듬해 1911년에는 환자가 10,000명을 넘어섰고 수술은 190건을 하였다. 그의 일손을 도운 것은 조지아나 휘팅 의사였다. 또한 이때는 전도를 전담하는 2명의 직원이 있어 남녀 환자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1912년 광주 병원에는 윌슨 원장과 함께 한국인 직원은 7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환자가 날로 증가하면서 진료소 공간이 부족하였다. 1909년부터 신축 공사에 들어갔다. 1912년 1월에 50개 병상을 갖춘 3층 건물을 완공하였다. 기증자는 미국의 그래함 부부였다. 그들은 자신의 딸 엘렌 그래함이 일찍 죽은 것을 안타까이 여기며 조선의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헌금하였다. 선교사들은 이를 기려 ‘그래함 병원(Ellen-Lavine Graham Hospital)’이라 하였다. 광주 사람들은 여전히 제중원이라 하였다.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은 말 그대로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가난과 질병의 고통 속에 있는 민중들을 돌보고 치료하므로 구제하고자 하는 취지로 이름을 붙였다. 본디 1885년 서울 광혜원으로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 근대 서양식 병원으로 보름쯤 지나 이름을 제중원이라 고쳤다.
서울 제중원은 알렌과 헤론, 그리고 빈튼에 이어 에비슨이 원장으로 지내던 1894년, 병원의 모든 운영권이 미북장로교에 넘겨졌다. 이후 장로교 선교회가 서울 외 대구와 선천, 광주 등지에 병원을 열면서 다들 ‘제중원’이라 하였다. 보통 쓰이는 용어를 고유한 이름으로 각 지역마다 쓴 것인데,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새롭게 병원을 신축할 때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각기 개명하였다. 서울 제중원은 1904년 세브란스로 바뀌었고, 광주 제중원은 1912년 그래함 병원으로 불리웠다.
광주 제중원, 혹은 그래함 병원은 윌슨 이후, 부란도, 카딩턴(고허번) 원장과 엘리제 쉐핑(서서평) 간호사 등의 헌신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1970년 미남장로교에서 재단이 분리되어 ‘광주기독병원’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윌슨의 병원 사역이 있는 한편, 광주 선교부의 책임자 유진 벨은 오웬과 함께 교회와 목양 사역에 힘썼다. 지역 전도에도 마음을 크게 하고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 전역을 서로 분담하여 조사들과 함께 출장을 자주 펼쳤다. 유진 벨은 광주 서북쪽의 영광, 장성, 고창과 순창 방면으로 다녔다.
벨 선교사가 북쪽을 담당하여 열심을 낸 반면, 오웬은 광주의 동남부쪽 화순, 장흥, 광양과 보성지역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목포 등 전남 서남부 지역은 프레스톤 선교사가 책임을 맡아 하였다. 각자 지역을 맡아 전도와 교회 세우기에 열심내고 의료 사역도 활성화되면서 사람들이 더 몰려 들었고 교회를 찾았다. 벨의 아내인 마가렛과 오웬의 아내 휘팅, 그리고 새로 들어온 미혼 엘라 그래함(엄언라) 선교사 등은 여성과 아이들 사역에 열심을 내었고, 성도들의 자녀들이 또한 충원되면서 유진 벨 선교사는 광주에서도 자녀들을 위한 교육 사역을 펼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