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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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가정은 1945년 8·15 해방 전까지는 내 나라 땅이 아닌 일본에서의 디아스포라였다.
1910년 대 일제는 한반도의 곡물과 자원 등을 침탈할 목적으로 경부선에 이어 호남선 철도를 부설하던 때, 철도 좌우 20리 안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무임금 부역에 강제 동원했다. 열일곱 살이던 당시 아버지께서는 할머니와 함께 동원되어 막노동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하루는 작업장을 독려하던 일본인 순사(경찰)가 할머니를 넘어뜨려 이마와 손에 타박상을 입고 피를 흘리는 것을 보신 아버지는 피를 지혈시킨 후, 할머니를 업어 집으로 모시고 가서 안정을 시키신 다음, 현장에 다시 가셨다. 그리고 그날의 일과가 끝날 때쯤 아버지는 이웃 동네 절친과 의기투합하여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보조원을 현장에 있는 공구 등으로 초죽음이 되도록 가격한 다음, 그날 밤 아버지는 아버지의 외가의 도움을 받아 두 청년은 일본으로 도망하였다. 그리고 3년 후, 아버지는 비밀리에 귀국하여 아버지의 외가댁에서 할머니가 정하신 어머니와 백년가약을 맺고, 부모님은 할머니를 모시고 다시 도일(度日)하였다. 그러니까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때까지 아버지는 33년, 어머니는 30년을 일본에서 사시면서 우리 6남매를 성장시키셨으며, 출가한 두 누나 가족을 뺀 4남매는 부모님을 따라 1945년 10월 초순 환국(還國)하였다.
우리 6남매는 도쿄(東京)에서 태어나 큰 형님과 큰 누나, 둘째 누나는 결혼을 했다. 막내인 필자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인 1941년 12월 8일(미국은 7일) 주일 새벽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해군기지 진주만을 공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한 축인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서 미 공군기 B–29 폭격기의 폭탄 투하와 해·공군 전투기들의 무차별 기총소사로 인명 피해는 물론 일본 열도가 초토화되는 전쟁의 참혹함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지옥 그 자체였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차례 안전 지대를 찾아 난을 피하였지만 태평양 전선을 완전히 장악한 미 해·공군의 포화 앞에 일본 본토에 안전 지대는 전무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이 폭격을 피하여 소개(疏開)하는 전쟁 동안, 다시 말해서 필자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도쿄를 떠나 일본이 패전한 8·15해방 때는 천키로가 넘는 다른 섬 시코쿠(四國)의 카가와 현 타카마츠 시(香川県 高松市) 외곽의 깊은 산 속 마을에서였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께서 운영하는 건설 현장이 있었던 연고로 이사를 했고,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전, 우리 가정이 타카마츠 시에 우거하였을 때의 이야기다. 6학년의 누나와 4학년의 필자는 히가시하마(東浜) 초등학교에 전학하였다. 그때가 1학기 중반이었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6번째의 전학이었다. 둘째 형은 인문학교 4학년인데 역내(城內)에 인문학교가 없어 공업중학교에 전학하였다. 필자가 1학기 편입할 때는 나이 드신 여 선생님이 친절하고 잘 가르치셔서 금방 급우들과도 잘 어울렸는데 2학기에는 남자 선생님이 새로 부임하면서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이름하여 타다 미노루(多田實), 필자가 눈을 감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있다가 육군에 입대, 만주(지금의 중국 동북3성)에 주둔하여 갖은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 관동군으로 전투 중 왼쪽 다리를 잃고 상이군인으로 제대, 다시 교직으로 돌아와서 필자의 담임 선생으로 부임한 인물이다. 타다 선생의 부임은 역설적으로 필자에게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일깨워 주는 전환점(轉換點)이 되게 하였다. 선생은 직설적이고 신경질적이며, 폭악했다. 웃음이란 없고, 짚고 다니는 목발은 폭력의 도구였다. 필자로서는 1학년에서 4학년 1학기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공포의 학교 생활을 맛보게 된 것이다. 한 번은 수업 시작 종이 울려 급우들은 저마다 제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담임 선생이 오지 않자 자연스럽게 참새들처럼 여기저기에서 히히덕거리며 소란스러운 중에 담임 선생이 나타났다. 교실은 금방 조용해졌고, 반장은 일어서 “열중 쉬엇! 차렷! 선생님께 경례!”라고 구령을 하였으나, 선생은 인사도 받지 않고 “일본혼(야마토 타마시, 大和魂)이 빠졌다”하고 꾸짖고 학생 전원을 양손 들고 “야마토 타마시”를 계속 반복 외치게 하는 벌을 주었다. 그리고 수업을 마치기 얼마 전에서야 “항상 정숙하라”는 훈시와 더불어 본 수업의 요점을 설명하는데 종료 종이 울려 마치는 일이 있었다. 하루는 필자가 속한 분단이 수업 종료 후 청소를 했을 때였다. 분단의 남녀 학생들은 책상 걸상을 뒤로 옮기고 쓸고 닦고 다시 책 걸상을 제자리에 정돈을 하는 한편, 복도와 창문까지 닦은 다음 당번이 선생께 청소 완료 보고를 하였다. 교무실에 있던 담임 선생이 와서 전체를 훑어보더니 교실과 복도 사이의 창틀 밑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고 걸레질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교실 바닥부터 걸레질을 다시 하라는 경고를 받고 다시들 열심히 청소를 하였다. 재검사를 한 선생은 필자를 지목해 학급에서 키가 제일 큰 놈이 책상에 의자를 올려놓고 높은 창틀도 닦아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고 비속어를 쓰면서 나무라는 것이었다. “저는 너무 어리고 겁이 많아 그렇게 올라갈 수 없다”고 하자 반항한다고 목발로 등짝을 가격하여 앞으로 넘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갑작스러운 구타에 넘어져 몹시 아픈데 엄살을 부린다고 한 차례 더 때리면서 창틀 세 곳의 청소를 필히 혼자 하라고 해서 명령대로 하였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과정까지 전쟁 중 여러 학교에 전학하면서도 성적표에 항상 성적이 좋고 품행이 단정한 모범생으로 기록되었던 필자가 타다 선생에게는 전혀 상반된 학생으로 비춰진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동급생들도 의아해 했고, 필자 자신도 점점 등교 자체가 공포스러워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등교를 했더니 앞서 등교한 급우들의 심상치 않은 눈빛들이 서로 마주쳤다. 누군가 칠판에다가 ‘칭바 다메(ちんぱ だめ, 절룸발이 안 돼)’라는 낙서를 했다는 것이었고, 담임 선생이 보고 갔다는 돌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필자가 입실을 했을 때는 지워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 교시가 시작되자마자 담임 선생은 키가 큰 끝줄 다섯 명을 앞으로 나오라 하더니 이른 아침 키 큰 학생이 교문 밖으로 나갔다는 목격자가 있는데 “너희들 다섯 사람 중 누구냐?”라고 묻는 것이었다. 우리는 의외의 일이라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하자 교실 앞 교탁 밑에 무릎 꿇게 하고 양손을 올려 벌을 받게 되었다. 선생은 수업은 하지 않고 만주에서 천황 폐하를 위해서 적군과 싸웠는데, 그 적군 가운데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일본 정부의 선전 문구)임에도 조선의 게릴라들이 있었다는 무용담(?)을 하는 것이었다. 반장을 포함한 우리 다섯 사람은 다리가 저리고 화장실도 가고 싶은 급우도 생겨 한 학생이 담임 선생에게 고통을 호소하자 목발로 다섯 학생의 등을 가격하면서 죄를 고백하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필자가 소변이 심히 마려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아뢰었더니 다짜고짜로 구타하면서 “조센징노 쿠세니”(조선 놈의 주제에)라는 모멸적인 한국인 비하 욕설을 퍼붓고 구타하는 바람에 필자는 그 자리에서 바지에 배뇨를 하고 말았다. 선생은 반항심에서 일부러 오줌을 쌌다고 하면서 필자를 부서진 책상, 걸상이 쌓인 창고에 데리고 가 그 안에 가두었다. 너무도 충격적인 수모였고, 어린 필자는 너무 억울해서 한없이 울었다. 한편, 집에서는 해질 때까지 막내가 안 오자 어머니가 염려가 돼서 6학년인 누나더러 찾아오도록 하자 누나는 동네 아이들에게 필자의 이야기를 듣고 학교에 달려가서 숙직 선생님께 말씀드려 창고에 갇혀있던 필자는 그제서야 누나를 따라 하교하게 되었고, 부모님께 그 동안에 겪었던 억울함을 눈물로 토로하면서 그 학교는 절대 다니지 않겠다고 하소연을 하였다. 성장해서 교단에 서게 된 필자는 타다 미노루 선생은 어린 학생 제자를 인격 살해한 자였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튿날 아버지는 필자를 앞세우고 학교에 가서 교장 선생님께 그 동안에 있었던 담임 선생의 비교육적 처사에 강하게 유감을 표하고 자식의 학교 전학을 요청하였다. 교장 선생은 필자를 나가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고 담임 선생을 호출했다. 아버지의 고성이 밖에까지 들려올 정도로 항의성 말씀이 한참 이어지고 다음 두 세 분의 선생님들이 교장실로 들어갔다. 결국 아버지의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져 필자를 집에서 멀지 않은 하나조노(花園)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고 4학년까지 학교 건물에서의 수업은 마지막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타다 미노루 선생은 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으로서 우리 조국의 독립군과 싸우다가 다리를 잃은 장애인이 된 상태에서 교적부에 필자가 <조선인>임을 확인하는 순간 ‘주적 개념’의 증오심이 필자에게 강렬하게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 유추해 볼 수 있다.
일본의 신학기는 4월이었다. 그런데 그 이전에 타카마츠 시가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다시 숲이 우거진 농촌으로 옮겼는데 5학년 때부터는 동네 단위로 1학년부터 6학년 학생들이 사람의 노출이 안 되는 장소에 모여 파송된 선생님의 지도 아래 시간표에 따라 자습을 하고, 5교시부터는 뽕나무 껍질을 벗기거나 송탄유(소나무 기름)를 짜기 위한 뿌리 캐는 노동을 하였다. 출결석과 성적 처리는 파송된 선생님이 각 과목 자습 노트를 검사하여 각 학년 반 별로 보내어 합취하는 형식이었다. 이와 같은 기형적인 교육과 노동은 일본의 패전 후까지 지속됨으로써 일본의 모든 교육은 전쟁에 묻혀버렸다. 평생 ‘부왜노(附倭奴 ; 왜 나라에 붙어서 나라를 해롭게 하는 짓)’의 생활을 거부하시며 동포들을 모아 건설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8·15 광복이 되고 일본의 철도가 임시로 복구되자 먼저 동포들을 귀국시킨 다음 우리 가족도 귀국길에 올랐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는 가운데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하고,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춘원 이광수는 “천황 폐하의 적자(嫡子)가 된 것이 얼마나 고맙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마음으로부터 느끼게 된다”는 그 망령은 우리 가문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던 그 역사관(歷史觀)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DNA가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2천 년 중반기부터 고개를 내민 친일 뉴라이트(New Right) 운동이 근대 일제 침탈의 뼈아픈 역사를 미화하고 헌법정신에 의한 국기(國基)를 흔드는 반역사적 사관(史觀)을 노골화하고 국력 분열로 남남 갈등이 도를 넘었다. 역사는 이념과 주의를 뛰어넘어 정직해야 하고, 하나의 대한민국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통합된 조국의 모습을 만들어야 할 절체절명의 시대에 우리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