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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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북문안 교회가 뿌리를 내리며 날로 성도들이 증가하였다. 어른 남녀의 성장만큼이나 그들의 자녀들도 교회에 출석하였다. 주일학교 아이들도 늘어갔는데, 아이들은 비단 일요일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늘상 교회에 와서 놀다 가곤 했다. 이렇다 할 게 없는 당시 여건에서 교회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터였다. 유진 벨은 이들을 위해 주중에도 체계있는 교육을 실시하기로 결단하였다. 1908년 광주의 기독교 남녀 학교가 시작된 것이다.
남학교는 벨이 책임을 맡아 한 명의 아동, 최윤옥(마가렛 어학선생 최재익 아들)으로 시작하여 이내 20여명이 등록하여 출발하였다. 그 학생들은 변영득(변창연 아들), 장맹섭(김현승 장인), 조정환(1956년 외무부장관), 최영욱(초대 전남도지사) 등 후에 광주와 대한민국의 중요한 지도자로 자란 이들이 많았다. 선교사 외에 한국인 교사로는 남궁혁(영어), 홍우종(한문) 등이 활약하였다. 남궁혁은 우리나라 최초 신학박사 학위자로 평양신학교 최초 한국인 교수로 일하였고, 홍우종 역시 광주북문안 교회의 장로요 일군으로 활약하였다.
광주 남학교 이름은 그 교육 정신과 정체성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하나님 한 분만 따른다는 교명 ‘숭일(崇一)’은 상당히 근본적이고 단호하다. 선교사들이 이 땅에 세운 기독교 학교마다 그 교명에서부터 기독교 정신과 남다른 건학 이념을 표방했다. 평양의 ‘숭실’을 비롯해서 미남장로교가 세운 학교들, 군산의 ‘영명’, 전주의 ‘신흥’, 목포의 ‘영흥’ 등은 그 교명 자체로 이 세상과 구별되고 유의미한 교육 집단임을 분명히 하였다.
남학교와 함께 동시에 시작한 여학교는 엘렌 그래함이 주로 맡았다. 당시 광주에는 먼저 사역해 온 선배 마가렛 벨과 조지아나 휘팅 여사가 있었지만, 학교의 실제적 책임은 이제 갓 들어온 신입 선교사인 그래함 양이 맡았다. 그녀가 후배이긴 했어도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어리지 않았고 교육 전문성도 갖추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또한 선배 두 기혼 여성은 당시 가정적인 일로 운신의 폭이 넓지도 못하였다. 현대 교회에서도 그렇지만, 선교 초기 남편 목사들이 일선에서 사역할 때, 아내 사모는 남편의 일을 보조하는 외에도 자녀 출산과 양육 등으로 그 수고와 짐은 너무 크고 많았다. 광주북문안 교회 초기 부부 사역자들도 대부분 신혼 초기여서 그 현실적 상황이 만만찮았다.
벨과 마가렛 부부는 1906년 3월 7일 태어난 윌리엄 주니어를 시작으로 1911년 홀랜드 스콧, 1914년 윌리엄 포드 등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오웬과 휘팅 부부는 1901년 메리, 1903년 루스, 1905년 도로시, 1909년 프란시스 모두 네 명의 딸을 두었다. 마가렛과 휘팅 사모들은 계속되는 출산과 양육으로 광주 선교 초기에는 역동적으로 활동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목포 지역을 돌보기도 하고 나중에 순천 선교부 개설에 힘을 기울였던 프레스톤도 광주에 주거하는 부부 사역자였다. 이들도 1905년부터 1911년까지 2년 간격으로 계속해서 아이를 네 명이나 낳았던 상황이었으니, 선교사 아내들이 감당하는 수고와 짐은 상당히 컸다.
물론 그럼에도 기혼 여성 사역자들도 광주북문안 교회 여성반 교육과 주일학교, 또 주중의 여학교 사역 등에 그래함 선교사의 뒷배가 되어주며 그들도 최선을 다했으리라.
광주 기독여학교의 최초 신입생 3명은 김명은(김윤수 딸), 최숙(최흥종 딸), 서명순(서명규 딸)이었다. 1대 교장 그래함(Graham, Ellen Ibernia, 엄언라, 1869~1930)은 노스캐롤라이나 마운트 울라(Mount Ulla)에서 출생하였고 그곳 주립대학을 졸업하였다. 미국 남장로교단의 선교사로 1907년 9월 3일 지명받았고, 콩코드(Concord)노회 파송으로 조선에 왔다. 그해 11월 22일 광주에 부임하였다. 당시 미혼이지만 38살의 나이였다. 광주 여학교 사역에 주로 책임을 맡아 하였고, 광주의 인근 지역 순회 전도 사역에도 힘썼다. 건강 악화로 세브란스에서 치료 중 61세 되던 1930년 9월 17일 사망하였고 그녀는 광주 양림선교동산에 누워 있다.
엄언라에 이어 1911년 9월 맥퀸 선교사가 2대 교장을 맡았다. 맥퀸(McQueen, Mary Anna, 구애라, 1883~1964)은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랜드(Rowland)에서 출생하였다. 남부장로교 대학과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졸업하고, 1910년 내한하였다. 내한 2년 차 1911년 9월부터 광주 여학교 교장을 이어 받아 1923년까지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 외 지역전도와 여성 사역, 그리고 광주 성경학교 교육에도 충성하였으며, 선교사 추방으로 잠시 미국에 돌아가 있다가 해방이후에 다시 광주에 와서 남은 사역을 감당하였다. 1951년 은퇴 귀국하여 고향에서 지내다 1964년 별세하였다.
구애라 선교사가 새롭게 여학교를 맡으면서 새 학교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미국 후원자의 기부가 이어졌다. 스턴스 여사는 일찍 사망한 자신의 동생 수피아를 추모하며 5천불을 광주 선교회에 헌금하였고, 이 성금으로 회색 벽돌로 된 3층 건물이 지어졌다. 선교회는 이 건물을 수피아 홀이라 하였고, 이때부터 학교 이름을 수피아여학교(Jennie Speer Memorial School for Girls)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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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수피아 졸업생들이 윈스브로홀 앞에서 선생님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
신앙과 근대 지성의 요람
엄언라와 구애라의 수피아학교는 기독교적 건학 이념에 따라 신앙 교육을 최우선으로 하고 민족 교육과 여성 교육을 강조하였다. 학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 신앙과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의 윤리와 정신을 고취하였고, 민족에 대한 자주 의식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물론 남녀의 평등과 인권을 강조하였다. 이런 교육은 일제 강점기 나라의 독립과 주권에 대해 1919년 3.1운동에 가장 먼저 앞장서서 광주의 독립운동에 나서게 한다든지 지역과 나라의 교육받은 일군이요 신여성으로 나서게 하여 왔다.
광주여학교
학교 설립 후 올해(1915)는 7회 졸업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1908년 봄 유진 벨 부부는 그들의 집 문간방에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습니다. 3명의 학생이 있었고 마가렛 선교사의 어학 선생(최재익)이 여가 시간에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올해 10학년 등급의 학교가 되었고 105명의 학생이 등록했습니다. 5명의 정규 교사가 상급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고, 관청과의 연락을 위한 사무직원이 한 명 있습니다. 거기에다 나이 든 몇 명의 학생들을 따로 가르치는 사감과 네 명의 선교사 부인들이 하루에 1-3시간씩 가르쳐주고 있습니다(구애라, 더 미셔너리 서베이, 1915년 12월).
1915년 일곱 번째 초등과정 졸업생을 배출했고, 고등과정은 첫 졸업생이 나왔다. 박애순은 목포 정명학교 초등에 이어 광주 수피아에서 고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 유학 후 모교 수피아에서 교사를 하였다. 재직 중에 3.1만세 운동이 벌어져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3.1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구속되고 재판 받은 수피아인은 23명에 이른다. 수피아의 민족 자결과 일제 저항은 계속되었다. 1929년 11월 1일 광주 학생운동에도 나섰고, 1937년 신사참배 강요할 때도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폐교하는 등 수피아 여학교는 민족 학교요 기독교 사학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채플을 드릴 때마다 기도 시간에는 모든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인도하도록 훈련하였다. 주로 졸업반 학생들이 번갈아 가며 회중을 인도하는 식으로 신앙의 성숙은 물론 리더십 훈련에 큰 역할이 되었다.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은 새벽 5시 반 일찍 일어나야 하고 학교 출석하기 전까지 반드시 과제를 다 해야 했다. 자기 방을 청소하고 룸메이트를 가족처럼 대하며 각 방마다 각자 기도회를 스스로 하도록 하였다. 선배는 후배에게 기도하는 법, 성경 읽는 법을 가르쳐 주며 신앙 선배로서 지도하였다. 하나님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며 함께 배우고 자라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교육하였다. 특히 수피아 학교는 악기 등 음악 활동을 기반으로 매일 예배 때마다 찬송을 힘차게 부르는 등으로 기독교 신앙과 소양을 튼실히 갖춰 나갔다.
현재 수피아 학교에는 꽤 오래된 학교 건물이 또 있다. 1929년 11월 30일 미남장로교 여전도회에서 희사한 5만 불로 윈스브로우관(Winsborough Hall)을 준공한 것이다. 수피아 학교는 해방 후 복교하였으며, 여전한 양림동산의 기독 사학으로, 숭일 학교는 광주 북구 일곡동으로 옮겨 여전한 신앙과 교육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