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인디언들 사이에 전해오는 옛 이야기 하나가 있다.
[한 젊은이가 우연히 검독수리 둥지를 발견했다. 누군가를 웃겨보려는 심산으로 이 젊은이는 검독수리 둥지에서 알을 하나 꺼내어 닭목들 꿩과에 속한 날지 못하는 뇌조(雷鳥) 둥지로 옮겨 놓았다.
알에서 부화한 뒤, 바꿔진 둥지의 검독수리 새끼는 뇌조 새끼들과 함께 자랐다. 이 새끼 독수리는 자기가 뇌조라고 여기며 그 섭생대로 행동했다. 뇌조처럼 꼬꼬댁 꼬꼬 소리를 지르고 씨앗이나 벌레를 찾아서 흙 속을 뒤적였다. 날개에 비해 몸집이 비대한 뇌조는 몇 미터 이상은 높이 날아오를 수 없는 까닭에 새끼 독수리 역시 그 이상 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힘차고 당당한 몸짓으로 성장한 검독수리는 여느 때처럼 뇌조들과 함께 흙더미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 때 한 그림자가 이들 위를 쏜살같이 지나갔다.
모두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창공 위에 검은 형체가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 치솟고 있었다.
“아! 정말 멋진 새구나!” 검독수리가 탄성을 질렀다.
“저건 독수리야!” 옆에 있던 뇌조가 알려 주었다.
“검독수리라고 부르지. 저 새가 바로 하늘의 왕이야! 저 독수리와 겨룰 수 있는 새는 없어.”
뇌조는 고개를 떨구며 한 마디 더 붙였다.
“꿈도 꾸지마. 나는 결코 저런 새가 될 수 없으니까.”
이들은 다시 흙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뇌조들과 함께 있던 검독수리는 그렇게 높이 치솟아 올라가는 장면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검독수리는 뇌조가 뛰어오르는 높이 이상은 결코 날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비극적이지만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필자를 비롯한 우리 그리스도인들=교회(Church)-의 삶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검독수리처럼 우리 역시도 하나님이 주신 날개로 하늘을 높이 날 수 있게 창조되었고, 또 그런 목적으로 구원 받았다.
특권으로 부여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召命,calling)은, 바람을 가르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 우리 하나님을 더욱 깊고 친밀하게 알아가며, 속박이나 얽매임 없이 활력이 넘치는 예배의 감격을 체험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숭고한 모험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을 위해 품으신 계획이며,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도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육적인 삶이나 속된 영성으로 흙더미를 헤집는 것으로는 우리 영혼이 갈망하는 성취감을 결코 맛보지 못한다.
모름지기 우리 그리스도인은 회심(回心)의 순간부터 위로 날아오르도록 재창조되었으며, 이를 위한 모든 자원도 우리 안에 갖추어 주셨다.
부르심을 받은 소명자를 향한 하나님의 참된 계획에 우리가 사명을 다할 때 비로소 영원한 기쁨을 맛보며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10월 31일은 종교개혁 제 506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 기독교는 130년의 선교 역사를 이어오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잠자고 있던 호랑이를 깨웠다.
근현대사를 완전히 변화시켰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서게 하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그런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 그 근본 원인은 윤리와 분리된, 왜곡된 칭의론(稱義論)을 복음이라고 선포하는 데 있다.
‘칭의’란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는 사도 바울의 ‘이신득의(以信得義)’, 즉 믿음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양도해 주신 은총의 선물이며(엡2:8), 이 은총으로 ‘구원’받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자를 ‘의인’이라 칭한다. 이것이 칭의, 의인됨, 의인의 신분을 얻음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義人)됨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렇게 의인된 그리스도인들은 ‘의의 열매’(빌 1:11; 약 3:18)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이루어지게 된다고 성경은 가르치신다.(요 5:22; 살후 1:5)
전통적으로 개신교는 바울의 이와 같은 칭의론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은혜와 믿음에 의한 ‘칭의’ 뒤에 윤리적 삶을 요구하는 ‘성화’의 과정이 있다는 ‘구원의 서정’론의 구도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칭의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칭의를 ‘무죄의 선언’ 또는 ‘의인이라 칭함’의 법정적 의미와 함께 ‘주권의 전의’, 다시 말해서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전됨이라는 관계적 의미도 가진 것으로 이해하며, 믿음의 시작점에 선취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현재적 삶을 거쳐 최후의 심판에서 완성을 얻는 구원의 전 과정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죄인들에게 자애로운 아빠 하나님의 용서와 통치를 받아 구원을 얻도록 가르치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에서 이해했을 때만 칭의론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확고히 주면서, 동시에 의로운 윤리적 삶을 요구하고 가능하게 하는 참된 복음 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율법의 문제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의 논쟁하는 상황들에서는 주로 ‘칭의’라는 언어로 표현하지만, 헬라 이방인들과의 관계에서는 ‘성화’라는 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바울의 언어 사용을 제대로 살피면, ‘성화’는 ‘칭의’에 이어지는 구원의 새로운 단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함께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러한 백성으로 살아감을 나타내는 동의어임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칭의’를 믿는 자 되는 세례 때 선취한 구원(과거)과 최후의 심판 때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미래)애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통치를 받아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감(현재)에서도 적용되는 범주임을 가르쳐 준다(롬1:3-4, 16-17).
그러므로 ‘칭의’의 법정적 의미와 관계적 의미를 둘 다 중시하여 ‘주권의 전의’, 곧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전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전 과정(과거, 현재, 미래)을 포괄하는 것임을 알게 되어, 윤리와 분리된 칭의론이 아니라 윤리적 삶을 요구하는 올바른 칭의론을 믿고 행하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이 칭의의 시작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대속의 제사로 넘겨 주심으로써 이루어지고, 그것의 완성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석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중보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의 현재적 과정도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통치에 의존하고 순종하여 ‘의의 열매’를 맺는 믿음의 삶의 구조로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자적 경륜 가운데 성도들 각자에게 주신 특별한 사명(‘소명’)의 수행과 최후의 심판 때 얻는 ‘상’(賞), 그리고 ‘예정과 성도의 견인론’과 ‘탈락의 가능성’이라는 긴장 가운데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하리라는 복음을 견지하는 것이 신앙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참된 경건과 거룩을 추구해야 할 교회의 본질이 무시되고, 교회와 세상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칭의와 구원에 대한 깊은 지식이 얕으며,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진리에 대한 무지와 더불어 이 복음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 고백 후의 삶의 모습과 관계없이 구원을 얻었다는 「구원파」적인 방종주의, 삼박자 오중축복이라는 현세적 탐욕의 배금주의 등의 극복과 성경적 진리 회복의 근본은 신학교와 목회자가 말씀의 빛에 비추어 바르고 반듯하게 교육하고 갱신되어야 할 절체절명의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많이 다루는 새 언약의 –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보혈을 흘리셨고, 그 분의 ‘의’로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신 – 진리들은 복잡한 신학 전문용어가 아니다. 즉 ‘칭의’는 삶을 뒤바꾸고 검독수리처럼 하나님의 창공으로 솟아오르게 하는 진리 그 자체이다.
따라서 검독수리는 날아야 독수리이듯이, 교회는 바른 칭의론으로 ‘앎’과 ‘삶’이 일치되어야 건강한 교회로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