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으로 영국교회사의 특징을 보면, 교회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이 정치적 사건, 또는 국왕의 거동에 따라 결정되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위 성직자들이 왕실로부터 받는 대우를 자신들의 본래의 임무인 교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들의 눈은 항상 왕실을 의식했고 종종 왕실에 대한 아첨의 설교를 하였다. 이들의 설교는 회개 대신에 정치적으로 듣기 좋게 하는 설교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악한 것은 신도들을 위해 교구를 순회하는 일과 가정방문이 불충분했다. 많은 목사들은 자기 교구 안에서 살지 않고 도시에서 호화로이 생활했다. 성직자로서의 직무와 집례해야 할 예배는 목사가 얻은 수입에서 작은 급료로 고용된 부목사에게 맡겼다.
사회는 암울했지만 영국은 위대한 해양국으로 부상했다. 스페인의 왕권 계승권이 끝난 1713년의 유트레히트 평화조약(The Peace of Utrecht)은 영국에게 노예 매매에 대한 독점권을 주었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된 농장주들은 고국에 흑인과 인디언들을 데리고 와서 다시 팔아 넘겼고 영국의 젊은 남녀들은 외국으로 나가는 배에 팔려나가서 부도덕한 상인에게 넘겨졌다. 마을에서 폭력이 난무했고, 거기에 오락과 여흥이 곁들여졌다. 야만적인 채무자 구치소 제도가 채권자와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 손에 법적 권리를 전적으로 넘겨주었다. 돈이 없어서 채권자의 희생물이 된 채무자는 범죄자와 함께 구치소에 감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세기에서 18세기 초에 걸친 시대적 정신은 크게 프랑스의 궁중생활에 의해 결정되었고 또한 정치적 결정에 따라서 그리고 기독교의 기준에 대한 무관심과 향락에 의하여 영향을 입었다.
요약하면, 18세기의 영국은 ‘3R 시대’(Three R’s Age)라고 일컫는다. 즉,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 산업 혁명의 시대(The Age of Industrial Revolution), 종교적 부흥의 시대(The Age of Religions Revival)가 그것이다.
1. 시대적 배경
1) 사상적인 배경
존 웨슬리가 독일 경건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셀(George C. Cell)은 The Rediscovery of John Wesley에서 웨슬리 부흥운동의 원동력이 경건주의였음을 밝힌 바 있다 :
웨슬리는 교리적이며 실제적인 기독교의 새로운 체계를 확립했다.…웨슬리에 있어, 그 원동력은 독일 경건주의에 힘입은 바 크다. 경건주의는 루터 신앙의 가장 생명력 있는 부분과 종교개혁의 원동력의 계승이었다.
독일 경건주의 기원은 15세기 초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후스(Johann Huss, 1372-1415)의 감화로 모라비아(Moravia)와 보헤미아 지방에서 생겨난 “보헤미안 형제단”(The Bohemian Brethren)에 까지 소급된다. 종교개혁 당시에 경건주의 운동의 일부는 루터교에 가담하였고, 그 후 모라비아에 정착했다. 17세기의 30년 전쟁 때, 로마 가톨릭교회의 박해로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으나, 1725년 작센(Sachsen)지방의 헤른후트(Herrnhut)에서 진젠도르프(Zinzendorf) 백작에 의해 재조직이 되어 모라비안파로 불리우게 되며, 경건주의는 깊은 종교적인 감정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도와 성서연구의 모임을 통해, 정서적으로 강력한 헌신과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중요시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신앙 경험에서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의 도리와 그 중요성에 대한 직관적인 지식을 주장했다. 셀(George C. Cell)에 따르면, 이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의 원동력이요, 강조점이었던 “경험으로서의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 as an experience)을 재주장함으로써, 형식주의의 위기에 직면했던 루터교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웨슬리가 모라비안 경건주의자들과 접하게 된 것은, 그가 미국 조지아주에 선교사로 가는 배 위에서였다. 무서운 풍랑이 이는 대서양에서 죽음의 위험 앞에 놓였을 때, 웨슬레는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던 반면, 모라비안 교도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찬송을 하는 확신에 찬 신앙 태도에 큰 감명을 받았다.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체험 이후, 웨슬리는 1738년 여름 모라비안 교단의 본산지인 독일 헤른후트를 방문하였다. 거기서 루터의 마음속에서 역사한 그 영력이 평범한 모라비안 신도들의 영속에 다시 살아 역사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모라비안 교도들로부터 “믿음의 능력의 산 증거”와 “안과 밖의 모든 죄에서의 구원”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의심과 두려움에서 해방받은 확증을 느끼고 귀국했다.
웨슬리는 영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있었을 때, 모라비안 교도들이 루터의 복음관을 소개해 준데 대해 고맙게 생각했으며, 그가 윌리암 로오(William Law)의 신비주의와 손을 끊게 된 것도 그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리(Umphrey Lee)가 쓴 《요한 웨슬리와 현대세계》에서 “감리회 운동(Methodism)이 영국 경건주의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웨슬리와 모라비안 경건주의와의 관계를 적절하게 시사해 준다. 이리하여 “개인주의, 감정, 경험 그리고 교권주의로부터의 자유”가 웨슬리 신앙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 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