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산 단풍을 보니 문득 떠오른다.
윤선도의 ‘오우가’
내 벗이 몇인가 헤아려 보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이 밝게 떠오르니 그것은 더욱 반가운 일이로다
나머지는 그냥 두어라 이 다섯 외에 더 있으면 무엇하리
구름의 빛깔이 깨끗하다고 하지만 자주 검어지네
바람의 소리가 맑다지만 그칠 때가 많도다
깨끗하고도 그칠 때가 없는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까닭에 피자마자 쉬 져버리고
풀은 또 어찌하여 푸른 듯 하다가 이내 누른빛을 띠는가?
아마도 변하지 않는 것은 바위 뿐인가 하노라
따뜻해지면 꽃이 피고 추워지면 잎 떨어지는데
소나무야 너는 어찌하여 눈서리를 모르고 살아가느냐
깊은 땅속까지 뿌리가 곧게 뻗은 것을 그것으로 알겠노라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곧게 자라기는 누가 시켰으며
또 속은 어찌하여 비였는가 저러고도 사철 푸르니 나는 그것이 좋구나
작은 것이 높이 떠서 온 세상을 다 비추네
한밤중에 광명이 너보다 더한 것이 또 있으랴?
보고도 말을 하지 않으니 내 벗인가 하노라!
조선 인조시대 윤선도의 이 시는 평시조 연시조로 찬미적이며 예찬적인 시로써 물, 돌, 소나무, 대, 달을 오우 즉 다섯 벗으로 청초하고 순결한 자연관을 우리말로 다듬어서 세련되게 표현하여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다.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노래한 것이다. 1642년 인조 20년 금쇄동에서 은거하며 지은 작품이다.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때로는 고난이 은총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고난을 통해 잃어버렸으나 오히려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신앙이 있다는 점이다. 윤동주 시인의 고난은 ‘별헤는 밤’을 낳았다. 송명희 시인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한없는 은총의 글들을 남달리 남기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누구나 고난이 있을 수 있다. 고난이 왜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간편한 즉답은 없다. 하지만 받아들이고 잘 감당만 한다면 고난도 은총이요 유익이 된다는 점이다. 우선 고난은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내 삶에 유익을 가르쳐준다. 때로는 성공보다도 실패했을 때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도 하지 않았던가?
오스왈드 센더스의 사랑하는 아내가 중병으로 병상에 있었다. 지극정성으로 오스왈드 센더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간호하며 계속 곁에 있었다. 그때 그의 아내가 말했다.
“여보! 당신이 여기 내 곁을 떠나면 좋겠어요. 당신이 내게 장애가 됩니다.” 라고 했다. 남편은 섭섭했다. 그때 그의 아내는 말했다. “당신의 간호는 정말로 고맙고 감사해요. 그러나 나는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이 고통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에게서 배우기를 원해요.” 라고 말했다.
남편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했다. “하나님! 참으로 위대한 제 아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아내는 고통을 통해서 인간적인 위로를 기다리지 않고 예수님의 고통을 배우기를 원했다.
오늘날 이 세상은 교만한 자들의 소리가 가득하다. 돈만 있으면 교만하고 조금 더 배우면 교만하고 인물 좋고 출세하면 교만하고 해서 남을 무시하고 천대한다.
지난 여름 무더운 날씨에 산의 나무들은 쑥쑥 키가 커서 위로 올라갔다. 옆으로 나이테를 남기며 둥그렇게 커졌다. 그러나 벌써 강원 산간지대에는 눈이 왔는데 춥다. 겨울이 온 것이다. 찬바람 부는 겨울이 오면 모든 나무들은 속을 채운다. 성공했다고 밖으로 교만이 설친다. 그러나 고난이 올 때는 안으로 겸손해진다. 어디 나무뿐인가?
사람도 성공할 때 밖으로 돌면 흥청망청거리는 경우가 있다. 어려울 때는 가정으로 돌아온다. 인격의 성숙은 외형적으로 잘 나갈때가 아니다. 내가 크게 성공할 때는 세상이 보인다. 그러나 병들어 누워 고난이 오면 하늘이 보인다. 반짝이는 금은 연단의 고난에서 온다. 요셉도 다니엘도 모세도 바울도 신앙의 위인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도 고난도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낙엽지는 가을 울긋불긋 단풍잎 예쁜산 구경을 하면서도 내년 봄이 오면 화사한 날 연하디 연한 잎이 솟아나는 예쁜 나뭇가지들의 모습도 상상해보자. 아픔도 고난도 순간마다 지나가리라. 그리고 우리는 깨닫게 되리라. 때로는 고난도 은총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