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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결국 아버지 생전에 여관은 매도(賣渡), 작은 가옥으로 옮기게 되고, 농장마저 논 950평만 남기고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신묘막측하여, 먹구름에 홍수가 휩쓸고 가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저 구름 너머에는 찬란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음을 훗날에야 알았다.
사실 임곡은 아버지에게는 전혀 생소한 무연고지였다. 지인이라고는 누구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한학자이신 외숙(외삼촌)께서 우리 집에 오시면 이 고을에서 존경받는 어르신 몇 분이 외숙을 뵈러 오셔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친분을 쌓는 우정의 사랑방이 되었다.
그 몇 분 가운데 홍 목사님이라는 분이 간혹 아버지를 방문하셔서 도쿄 이야기를 나누셨다. 아버지와 동연배이신 목사님은 도쿄 아오야마가쿠인대학( 青山学院大学; 미국 선교사가 설립한 사립대학교로 신학부가 현재도 있음)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신 애국자이시며, 일본 유학 시절을 회상하며 대화가 통했는지 오시면 신문도 보시고 바둑도 한 수 두고 가시기도 했다.
필자는 편식이 심하여 건강에 매우 취약한 체질이어서 귀국한 해가 10월인데도 말라리아(Malaria,학질) 감염병에 걸려 매년 더울 때면 말라리아로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는데, 때로는 목사님이 기도를 해 주고 가시기도 했다.
목사님은 성탄전야 교회에서의 축하 잔치에 아버지를 초대하여 따라 갔었고, 부활절에도 강권 받아 찐 계란을 받아오기도 했지만 아버지도 필자도 종교의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택한 자를 부르시는 소명(召命,calling)의 <때>는 분명히 있었음을 먼 훗날에야 깨달았다. 휴전이 되자 아버지가 필자를 찾아 울산에 오셔서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하시는 말씀 가운데 부모님과 형수, 그리고 누나가 공산당 치하에서 농장에 숨어 사는 처지에 불을 피우면 연기가 나서 붙잡힐 위험이 있어 익힌 음식을 해 먹을 수가 없는 처지여서 농산물을 생식으로 먹을 수 밖에 없을 때 이웃에서 농사를 짓던 장형의 친구 분이 남의 눈을 피하여 찐 감자나 고구마 등 음식을 종종 놓고 가는 친절에 허기를 채웠다고 하시면서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너의 큰 형이 아직 움직일 수 없으니 네가 꼭 인사를 드려야 한다”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
귀가했을 때의 집은 동네 한 가운데 위치한 주택이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장형은 여전히 농막에서 형수의 간병을 받으며 회복에 힘쓰는 처지였다.
아버지와 필자가 열사병을 앓다가 결국 아버지가 별세하시는 순간, 임종을 지키던 필자는 거짓말처럼 열이 내리고 황룡강 건너 농막으로 뛰어가서 장형께 아버지의 운명(殞命)을 알릴 수 있었다.
이렇듯 필자의 치유는 기적적이었다. 아니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채 떠나신 것은 한이다. 장례를 치루고 사흘 후가 일요일이었다.
아버지의 유언이 되어버린 장형의 친구 분께 - 문상 오셨을 때도 우리 가족은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드렸지만 – 필자가 가정으로 인사 차 방문했는데 부재중이었다. 옆집의 말인즉 교회에 가셨다는 것이다. 나선 길에 교회까지 찾아가서 그분을 만나 감사의 인사와 함께 봉투를 드리는데 뿌리치면서 “마침 잘 왔다. 함께 들어가자”고 하면서 필자를 예배당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정말 엉겁결이었고, 강제적인 예배 참석이었다.
그 분이 바로 장판성 집사님(張判成,훗날 장로로 섬기다가 별세)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장 집사님을 통하여 필자의 가정을 구원의 방주에 오르게 하셨으니,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신 하나님은 새 언약 백성 삼으시려고 우상의 나라 일본에서 출애굽 시키시고, 조국으로 불러 내어 모진 고초를 겪는 가운데 인생의 전환점(turning point)에 서게 하신 것이다.
홍 목사님의 초대로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갔을 때의 실내 구조, 중간에 하얀 커튼이 처져 있어 커튼 왼쪽은 여자들, 오른쪽은 남자들로 나뉘어져 예배하였는데, 그날 앉은 자리는 남녀 유별 그대로였지만 커튼은 말끔히 거두어져 있어 교인의 시선이 필자에게 집중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난감하기 까지 하였고 더군다나 학교 친구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올 때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목사님도 홍 목사님이 아닌 젊은 목사님이었다.
예배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난생 처음 대하는 찬양대의 합창은 필자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천사의 음성 같았다고나 할까. 홍 목사님 때에는 찬양대가 없었다.
성악가가 꿈이었던 필자에게 성령께서는 찬양대의 찬양을 접촉점으로 삼으시고 구원의 길로 이끄셨다고 믿는다.
그 날 젊은 목사님의 강설도 울림이 있었다. 다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논조는 알 수 있었다. 예배 후 많은 분들의 환영의 덕담을 들을 수 있었고, 목사님은 예배당 입구에서 인자한 모습으로 “나 이익관입니다”라고 인사하는데 몹시도 송구스러웠다.
장 집사님은 어머니가 주신 봉투를 교회에 저의 가정의 이름으로 헌상하셨다고 귀뜸해 주셨다. 그리고 “이제는 꼭 교회에 나와야 하네”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2시간 가까운 예배는 초신자인 필자에게는 <곤혹> 그 자체였다.
“나락(奈落)으로 떨어진 인간의 절망은 신(神)의 출발이다”라고 했던가.
필자의 절대 의존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이 도저히 실감나지 않는 상황에서 고마움의 인사를 갔다가 새로운 세계를 대하고 오는 귀갓길은 카오스 (khaos,혼돈) 그 자체였다.
어머니와 누나는 “왜 그리 늦었느냐?”고 물으셨고, 필자는 교회에서 있었던 일과 느낌을 말씀 드렸다.
“교회에 다니고 싶으면 다녀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술 담배도 안 한다고 하니 너에게 딱 맞다.” 어머니의 말씀이셨다. 중학교 5학년까지 다니다가 한국에 와서 언어와 글 때문에 진학이 보류된 둘째 형은 영어 공부에 매달리는 한편, 또래들과 친구가 되더니 뜻밖에 술꾼으로 변하였고, 장형의 외도와 도박은 부모님의 아픔이요 가산의 몰락과 직결된 가문의 수치였기에 “나는 공부 외에는 결코 헛눈 팔지 않겠습니다”라고 부모님께 맹세했던 막내아들 필자의 다짐을 어머니는 기억하시고 교회와 연관지어 말씀하셨던 것이다.
당시 우리 나라 전기 사정이 최악이어서 송전 시간(送電時間)이 일몰 시간부터 저녁 10시까지, 아침 5시부터 7시까지였다. 밤에 3시간 내지 4시간 잠을 자고 석유 호롱불 밑에서 계속 공부했던 필자의 얼굴은 코와 눈 언저리 등 얼굴 전체가 연소되는 석유의 그을음으로 새까맣게 되고 자주 코피 때문에 세수할 때의 시간이 길었다.
그런 때의 필자가 일요일이 닥치면 늘 갈등이 생겼다. 신앙적인 갈등이 아니라 선을 베풀어 주신 장 집사님께 대한 인간적 예의의 문제였다. 아침 10시 반 예배당의 초종 소리가 울리면 하던 공부 멈추고, 체면치레 눈도장 찍으러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다가 저녁 예배, 수요 기도회도 꼬박꼬박 나가면서 교회 분위기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필자의 신앙 생활의 첫걸음은 어떤 극적인 문제나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유언에 따른 “인사치레”가 필자를 통하여 전 가족 구원의 접촉점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건대 우리 가족을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을 삼으신 그 크고 넓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국권 회복과 환국(還國)을 계기로 필자를 매개로 우리 가족을 180도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생명의 길을 택하게 하셨던 것이다.
절망의 나락에서 붙들어 올리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