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9순이 된 필자는 역사의 시계 바늘을 80여 년 전, 패전국 일본에서와 온 가족이 조국으로 환국한 해방정국(解放政局)으로 되돌려 선친(先親)의 입장에 서 본다.
일본에서의 아버지의 생존 히스토리(history)는 여느 한국인과 다를 바 없이 고초와 멸시와 만난 극복의 시간들이었다.
17세 나이에 일인 경찰의 횡포에 응징하여 혈혈단신 도일(渡日)하여 닥치는 대로 노동을 하면서 고국에 홀로 계시는 할머니를 모시고 떳떳하게 살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삶의 터전을 닦으셨던 아버지.
일찍이 할아버지를 여의신 할머니는 외아들이신 아버지를 올곧게 키우시면서 서당(書堂) 공부를 열심히 시키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논어(論語)에 나오는 경구나 예화로 교훈하실 때가 종종 있었다. 환국하고서는 국제적 변화와 두 나라 문화 환경 차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점을 당신의 단견(短見)이라 말씀하시고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하다고까지 하셨다. 일본어로 ‘상식’(조시키,常識)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모든 일에 기교를 부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굴지 않으며, 옳고 그름과 선악을 구별해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말과 행동 모두에 중용(中庸)을 지키는 일이 상식**이다.” -필자가 근래 논어를 읽으며 선친의 깊은 교훈을 되새기며 찾아낸 글귀다-
아버지는 별세하실 때까지 우리 가족은 물론 이웃에게도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으시고 고상하게 사셨다.
각설하고, 일본에 건너가신 아버지가 어렵잖게 취업한 곳은 건설회사였다. 터널과 교량을 전문으로 하는 건설사로서 특히 안전도가 가장 우선시되는 토목현장이었다고 한다.
맡은 일에 충실히 일하며 작업이 손에 익어갈 무렵 책임자 격인 일본인 토목 기사가 아버지의 발 빠른 성실성과 공사의 적응력이 남다른 점을 인정하여 그 기사의 팀원으로 발탁되어 오랫동안 현장을 따라 다니며 지질, 공사 이론과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던 과정에 도일 3년째 되던 해에 할머니가 중병이시라는 편지를 받고 곧바로 귀국하셔서 아버지의 외가 –본가는 지명 수배로 위험-에 가서 할머니를 뵌즉, 이유는 할머니께서 며느리감을 정하시고 아버지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신부가 되실 어머니는 평택 임(林)씨 가문이었으며, 혼인예식을 올린 후, 가옥과 농토를 처분하고 부모님은 할머니를 모시고 일본에 정착하며 3남 3녀를 낳으셨는데 필자는 막내로 태어났다.
일본인 토목 기사의 전적인 신임 하에 문하생으로 많은 기술을 축적한 아버지는 그 분의 후원 아래 소규모의 건설회사를 설립하여 전력 투구하셨다.
아버지는 주로 현장에 계실 때가 많았으나 할머니께 대한 효성과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한국인의 자긍심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도쿄에 거주지를 두셨다. 그래서 필자가 태어난 곳이 도쿄의 수이도바시(水道橋) 역에서 가까운 고라쿠엔(後楽園)이었다.
그런 관계로 우리 가족이 귀국하여 임곡(林谷)에 정착하였을 때, 도쿄에 유학을 다녀오신 홍 목사님으로서는 도시도 아니요 농촌도 아닌 일확천금을 꿈꾸던 사람들이 들락거리던 임곡교회서의 목회 생활에 아버지가 대화의 대상이 됐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전도 대상자로 정하시고 방문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 또한 훌륭한 인격자이신 홍 목사님의 권유에 답례차(?) 막내 아들인 필자를 앞세워 크리스마스 이브 행사와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훗날 예수님을 구원의 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예수꾼이 된 필자로서 당시 선친께서 처한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시고 예배당 문을 여셨으나 두 차례 모두 불편한 마음으로 귀가하셨기에 필자 나름대로 교회 경계선에 머무셨던 경계인(almost Christian)이셨다고 표현하고 싶다.
어느 해 겨울 성탄 전야 교회 행사에는 일반 주민들도 다수 참석한 자리에 우리도 동석했다. 극장이나 구경거리라고는 전혀 없는 고장이라 종교와 관계없이 1년에 딱 한 차례 구경거리, 먹거리, 상이 있는 교회로 모인 듯 했다.
그런데 1부 예배에서 아버지는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이 집사라 하여 홍 목사와 장로와 나란히 높은 강대상 의자에 앉아 있다가 순서에 따라 성경을 읽은 사람을 주목하였다. 2부는 성극도 있고 일반인 노래자랑도 있어 동네잔치 같았다.
행사 후 집에 오셔서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인즉 “손님으로 오라 해 놓고 복잡한 자리 아무 데나 알아서 앉게 하고, 우리 집에 매일 육류를 대 주는 아무개(백정 신분)는 집사라고 높은 자리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초대받은 손님(양반)에 대한 도리가 아니니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선친은 교회 제도조차 반상(班常) 사회 통념의 관점으로 보셨던 것이다.
다음 해 어느 봄날 홍 목사님의 강권에 따라 아버지는 또 필자를 앞세워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당 앞 벽면에는 <예수 부활하셨네>라는 예쁜 글씨가 오려 붙여져 있었다.
부활주일이었던 것이다. 예배에 성찬 예식이 있는 순서 때였다.
이 순서를 진행하기에 앞서 홍 목사님이 한 말씀 하시자 민 장로라는 분이 아버지와 필자를 비롯하여 몇 사람을 지목해 뒷자리로 분리시킨 가운데 앞자리의 다수가 집례 목사의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멘트와 찬송 사이사이에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예식이 진행 되었다.
조금씩 분별력이 자리 잡혀가는 나이의 필자로서 “왜 하필 오늘 같은 차별화하는 날에 아버지를 오라! 하셨지?”라는 다소 불쾌한 마음을 갖고 부자(父子)는 집에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점심상을 물리치신 아버지께서 무거운 침묵을 깨신다.
“사람을 손님으로 초대했으면 먼저 손님부터 대접하는 것이 도리이지. 초대 받은 손님은 뒷자리에 밀쳐놓지를 않나, 자기들끼리만 나누어 먹지를 않나, 하는 짓거리들이 상놈은 상놈들이여!”
홍 목사님 입장에서는 부활절은 기독교 최대의 명절로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고 아버지를 강권하여 예배에 참석케 하셨겠지만, 적시타(適時打)가 터지지 않았던 것이다.
즉 그날의 예배와 목사님의 강설이 아버지는 물론 필자의 어린 마음에 전혀 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찬예식에 무지한 우리 부자(父子)에게는 인간적 역차별로 마음이 상했고,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오히려 신앙의 경계선에 머무신 채 사시다가 별세하신 것이다.
지금 이 나이에 당시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해 볼 때, 아무리 홍 목사님의 선의의 강권이라 했을지라도 평소 선친의 성향 상 전혀 생소한 종교 행사에, 그것도 성탄 전야와 부활절이라는 교회 명절에 참석하셨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버지만의 “깊고 어두운 회한의 나락에서 한 줄기 빛을 찾는” 심정으로 교회에 가셨지 않나 생각된다.
아버지는 철저히 고독하셨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사업상 밤낮으로 사람들과의 만남이 일상이었다면, 한국에서의 생활은 생소한 것 뿐, 여관업은 종업원들의 몫이고 어머니와의 대화 외에는 지역 어르신들과의 관계도 타향인지라 의례적인 사귐 정도였다.
술은 즐기시지 않았다. 친지들과 어울리시면 한 두 잔으로 분위기를 맞출 정도였지 취하신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일본인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할머니께서 엄히 가르치신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목을 지키려는 방편으로 술을 삼가셨다는 가르침을 받은 바 있다. 담배는 피우셨다.
30년 만에 환국하자 우리 자산의 뿌리까지 뽑힌 금광사기사건(金鑛詐欺事件) 이후 아버지의 흡연의 빈도가 잦아지셨는데, 어머니께서 위로하며 격려하시면, 간혹 어머니에게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 “그 때 임자의 말대로 동경으로 갔을 것을--.” 가족에게 미안한 아버지의 속마음이 담배 연기처럼 방안으로 흩뿌려졌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근심거리는 크게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일본의 패전 후 여러 곳의 공사비를 떼이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2백 명 가까운 동포 노동자의 임금 지불과 귀국 조치를 한 다음, 둘째 누님의 만삭으로 귀국길에 오르지 못한 매형으로 하여금 도쿄의 자산 처분과 채권, 채무 관계를 위임하고 오셨지만, 혹여 깨끗한 정산(精算)이 안 되어 그들에게 고통을 안기지나 않았는가 하는 염려였고, 다른 하나는 장형(長兄)의 외도와 도박이었다.
솔직히 가정의 치부요, 감추고 싶은 이야기다.
장형은 정말 미남이고 멋쟁이었다. 도쿄에서 태어나 초, 고등중등학교(당시 5년제)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근무 중 안동 출신의 안동 김 씨 성을 가진 역시 고등중학교 졸업생 재일 동포와 결혼하였다. 필자가 두 살이 되었을 때였단다. 그리고 오사카(大阪)지사로 발령 받아 그곳에서 금실지락(琴瑟之樂)을 누렸다고 들었다.
그런데 생각조차 하기 싫은 비극이 휘몰아쳤다. 필자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 동안 장형과 형수 사이에 두 딸을 두었었다.
큰 조카는 필자와 두 살 터울이었고, 둘째는 갓 돌을 지났을 때였다. 형수가 급성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폐렴이 두 조카에게까지 전염되어 한 달 사이에 세 모녀를 모두 잃은 것이다. 꼬마들이 병실에 가서 엄마의 모유 수유가 결정타였다. 당사자인 장형의 충격은 세상을 모두 잃은 청천벽력이었으리라.
방학 때에 부모님 따라 오사카에 가면 형님 내외의 승마하는 모습이며, 형수가 필자를 자전거 앞자리에 태우고 시장 등 여러 곳을 데리고 다녔던 추억이 생생하다. 그런 형수와 조카 둘이 세상을 떠나자 장형은 도쿄 집으로 합산하고, 아버지 회사로 옮겼으나 정신적으로 너무도 큰 시련을 겪다보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가족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부모님은 형수의 1주기가 지나자 한국인 규수를 맞이해야 한다고 형님을 설득시키는 한편, 아버지는 한국의 외숙 두 분에게 며느리감을 알아보도록 편지를 보냈다. 그러던 중 아버지께서 한국에 다녀오실 기회가 생겼다. 어머니의 여동생의 장남. 즉 필자의 이종 형 결혼식에 참석하실 겸 며느리감을 정하기 위해 귀국하셨다. 필자가 3학년 때 일이었다. 결혼식 후 아버지는 둘째 외숙의 중매로 신(申)씨 성을 가진 규수의 오라버니를 대면하여 그분의 가문과 인품이 마음에 들어 인연을 맺기로 하고 도쿄로 돌아오셨다.
규수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보지도 않은 채, 외숙이 어련히 알아서 중매 섰겠느냐고 신뢰를 하셨고, 외숙은 집안만 보았지 우리 집 환경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신 것이 불행의 단초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태평양전쟁이 본토까지 미치면서 일제 대본영(大本營)이 소개령(疏開令)을 내리자 아버지 회사의 현장이 있는 지역으로 몇 차례 이사를 하면서 시코쿠(四国) 타카마츠(高松) 시까지 흘러 들어갔다. 필자가 4학년 1학기 봄이었다.
아버지와 장형이 혼인 차 한국에 가셨는데 장형 혼자서 앞당겨 돌아왔다. 사정인 즉 형수되는 분이 무학이고 일자무식이라는 귀띔과 혼례 예식 중 신부의 인물이 너무도 박색(薄色)에 충격을 받은 장형은 예복을 벗자마자 아버지께 아뢰지도 않고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황당한 돌변사에도 아버지는 예의 수습하시고 형수된 신부를 대동 귀가하셨다. 사실 형수는 시집와서 일본에서, 그리고 6.25 한국전쟁으로 구사일생 만신창으로 살아 돌아온 남편을 농막에서 지극정성으로 간병하여 일어설 때까지 부부 아닌 부부의 불행한 관계가 그 동안 부모님에게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의 세월로 점철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별세 후, 필자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 가족을 구원하셨고 장형 내외분에게 7남매의 조카들을 복의 열매로 주셨다.
장형은 공산당의 모진 고문으로 후유증을 앓으면서 지리산 국립공원 조성에 참여했다가 1969년 56세의 나이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내 조국이 좋다고 일방적으로 가족을 이끌고 환국하셨지만, 정반대로 돌아가는 상황을 못내 미안하고 안타까워하시는 한편, 신(神)에 목마른 사람처럼 교회 문을 두 차례 여셨으나 신앙의 변두리에서 머뭇거리셨다.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이므로 자식으로서 판단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부모님을 향한 단장(斷腸)의 아픔은 신앙으로 치환하여 오늘도 아버지의 후손들은 구원의 은총을 찬양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며 각자 섬기는 교회에서와 일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있음이 은혜이다. 잃은 것이 눈에 보이는 물질이었다면, 얻은 것은 우주보다 더 큰 하나님의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