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공의로우시다. 먼저 ‘공의’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공의’라는 말은 ‘공평하고 의로운 도의’라는 뜻이다. 영어 성경에는 ‘righteousness’라고 번역되어 있다. ‘공의 또는 의’가 우리말로는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영어 성경에는 모두 ‘righteousness’로 되어 있다. 공의와 비슷한 말로 ‘정의’(正義)라는 단어가 있다.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의미한다. 영어로는 ‘justice’라 한다. ‘공의와 정의’라는 단어는 의미가 조금 다르지만 개념은 거의 같다. ‘공의’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올바른 도리인가?”할 때는 대답이 어려워진다.
법을 전공하기 위해 법대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있다. ‘정의’가 무엇인지를 배운다고 한다. 정의가 무엇일까? 결론을 미리 말씀드린다면 “세상에는 정의의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법학자들이 정의와 관련하여 추천하는 책 중에 2권을 소개하고 싶다. 하나는 ‘한스 켈젠’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다. 또 하나는 하버드대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다. 저자만 다르지 책의 제목이 같다. ‘한스 켈젠, 마이클 샌델’은 당대 최고의 석학이라 일컫는 학자들이다. ‘한스 켈젠’은 ‘정의의 객관적인 기준의 인지 가능성’을 부정한다. 다시 말해서 정의가 무엇인지 시대마다 다르다는 거다. 단체나 개인에 따라서도 정의의 기준이 다 다르다. 그러므로 “정의가 무엇인지 단정 지을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민주주의’가 정의에 가깝다고 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의’라고 여기는 ‘민주주의의 결정’이 보다 정의롭다고 말한다. 소수보다는 ‘다수’가 더 정의로울 수 있다는 거다.
이에 비해 ‘마이클 샌델’은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도 역시 민주주의가 비교적 정의에 가까운 제도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소수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차별금지법을 옹호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른바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를 옹호하는 듯한 주장을 하고 있다. ‘PC’는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에서, 인종·민족·언어·종교·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을 할 때 사용한다. 차별금지법의 ‘정치적인 용어’가 ‘PC’라고 이해하면,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한스 켈젠, 마이클 샌델’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정의’의 개념이 있다.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의이다”고 하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의 말이 옳은 것일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정의’는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분명하며 절대적인 ‘정의’가 존재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도리’가 있다. ‘진리’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의이다. 하나님 말씀이 정의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세상 만물의 창조주요, 주인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옳고 그름의 유일하고 분명한 ‘기준’이 되신다. 생각해보자!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이 어찌 감히 “내 말이 옳다. 이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나? 당신이 100억의 재산이 있자고 가정해보자. 아들이 셋이 있는데, 큰아들이 말한다. “아버지 재산 중에 50억은 내꺼야, 너희 둘은 20억씩만 가져가라. 아버지는 이제 사실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10억이면 충분해!” 그러자 둘째 아들이 반박을 한다. “아버지는 10억 드리고 우리 형제가 공평하게 30억씩 나누어 가져야지요. 그게 공평한 겁니다.” 그러자 셋째는 다수결로 하자고 한다. 이게 말이나 되나? 아버지의 재산이고 아버지의 소유인데 감히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며, 우주의 통치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만이 절대적인 진리이며 정의인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나지 않는다. 인생의 혼란과 방황은 ‘진리’ 되시는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때 끝이 난다. 예수님을 만날 때 방황이 종료된다. 지적인 방황이 끝나고, 인생의 방황이 끝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깨닫고 주님을 만나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 바란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지신 공의에 특징이 있다. 철저하게 ‘성부 하나님’ 중심이라는 사실이다. 자기중심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중심이다. 복음서를 잘 살펴보자! 예수님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애쓰신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가려질 때는 분노하셨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분노를 표출하시는 장면이 딱 한 번 나온다. 아주 크게 분노하셨다. 성전이 장사치들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분노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16절)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의’를 증명하려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의 의가 가려질 때는 한 치의 물러섬이 없으셨다.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예수님의 ‘공의’를 이루어갈 수 있을까? 예수님의 공의를 이루어가는 방법에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증거 할 때,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갈 수 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말하는 ‘의’는 공의(righteousness)를 말한다. 우리 인간은 죄로 인해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졌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의롭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전할 때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음은 ‘하나님의 법을 대적하는 세상의 법에 대항’하며 예수님의 ‘공의’를 이루어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차별금지법’이 그렇다. 차별금지법은 동성애, 동성혼 반대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다.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와 동성혼은 죄입니다”는 말을 못하게 된다. 또한 차별금지법은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법이다. 종교의 차별을 금하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은 전도를 못 하도록 ‘합법적’으로 통제하는 법이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의 ‘로마 시대’로 돌아가게 된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처럼 교회가 합법적으로 박해를 받게 된다. 그러니 얼마나 사악한 법인가!
예수님이 우리 시대에 대한민국에 계셨다면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채찍으로 내리치시는 것 이상으로 분노하실 것이다. 예수님의 ‘공의’를 이루어가는 성도도 그렇다. 하나님의 법을 대적하는 세상의 법에 대항해야 한다. 침묵해서는 안 된다. 침묵은 암묵적인 동조이다. “누군가가 알아서 하겠지..”하고 방관해서도 안 된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거룩한 명령이다. 예수님은 공의로우시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공의로운 성도가 되어 생활 속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질 수 있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