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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재 목사(전, 웨스트민스터대학원대학교, 교수) |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상대방 포수의 사인을 훔쳐 자기 팀 타자에게 일러주는 일이 들통 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한 팀만의 문제로 보도되었으나 심층 취재 결과 다수의 팀들이 그런 문제에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분석결과 전 세계 야구팬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감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스포츠(sports)는 스포츠맨십(sportsmanship)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뿐만 아니라 국내외 스포츠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불미스러운 일들을 접할 때마다 욕망 때문에 타락한 인간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생각하게 한다.
왜 그럴까?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이기고 소유하려는 탐욕으로 가득 찬 ‘게임스맨십’(gamesmanship)이 분출된 결과라고 단정 지을 수밖에…
적발된 팀이 이번에 재수 없이(?) 걸려들었으나 그런 속임수가 영구히 사라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더 세련되고 진화된 수법으로 재생산되지 않을까?
성공과 승리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본능과 욕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승리는 승리감이라는 명예에 그치지 않고 선수가 획득하는 정직하지 못한 부(연봉)와 깊은 연관이 있다.
결국 프로 세계에서 승부의 욕망은 돈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함수 관계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희망이라던 오늘의 한국 교회는 어떤가?
교회는 아직도 힘이 세다. 사람이 많고 돈이 많다. 그 힘으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정부와 대통령에게 코로나 방역대책을 똑바로 하라고 호통을 친다. 세상을 보고는 변화되라고 외친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어떤가? “너나 잘 하세요”
왜 그럴까? 과거의 교회는 한국 사회를 염려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예수님을 보여주고 믿으라고 했는데, 지금은 한국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고 조롱하는 상황으로 치환됐다.
이른 바 메가처치(mega church)의 민낯이다.
교회 담임 목사의 세습, 목회자의 재정 비리, 교회 직분의 실질적 매매, 개교회주의적·물량적 성장주의, 교회의 기득권 세력과의 결탁, 그에 따른 거침없는 불법행위- 예, 공로(公路)를 파헤치고 거대한 예배당 건축 -와 불의한 사회구조에 대한 암묵적 지지 혹은 노골적 옹호 등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구제와 봉사 사역을 전국 교회가 분에 넘치게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건강을 본질적으로 회복시킬 수는 없다. 지금 한국 교회에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교회 안에 깊숙이 뿌리내려 온 맘몬(Mammon) 숭배를 척결하는 것이다.
맘몬이란 인간과 세상에 신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돈’을 말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돈을 당시 통상적으로 사용하던 단어를 사용하시지 않고 굳이 아람어인 맘몬이란 단어를 선택하셨던 것은 돈이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 인격성과 영적 속성을 지닌 하나님의 대항마, 다시 말해서 경쟁신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심이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b)
맘몬에게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을 더 이상 주인으로 섬기지 못하게 하는 막강한 힘이 있음을 예수님은 지적하고 계신다.
일찍이 선지자 아모스는 부패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였다(암5:24).
또 선지자 미가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형식적 예배가 아니라 첫째, 공의를 행할 것, 즉 인간 간의 정직을 행하는 것이고, 둘째, 인자를 베풀 것, 즉 변함없는 사랑을 행하는 것, 그리고 셋째,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미6:8).
언필칭 교회는 이기는 곳이 아니다. 지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 예수님의 우아한 패배의 힘은 공의와 사랑이 그 뿌리다. 그러기에 증오와 경쟁과 폭력 체제를 그 뿌리부터 뒤 흔드는 참된 힘이 정의와 사랑에 있다. 그러므로 스포츠는 이겨야 살아남지만 교회는 죽어야 사는 역설의 신앙 공동체다. 철저히 비우고 , 낮추며, 지우며, 내려놓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힘이요, 그 힘의 자기 폭발이 바로 부활의 힘이다.
오늘 교회에 예수님은 계시는가? 행여 예수님을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예배당 안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계2:20) 아무도 듣지 못한다.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의 손에서 피가 흐르고 목소리는 잠겨서 갈라지는데 우리만 좋은 분위기, 값비싼 전자 악기와, 음향 기기, 화려한 조명과 고성능 카메라에 파묻혀서 위로를 받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욕망이 거룩한 정직으로 포장되었을 뿐, 공의도 정직도 사랑도 없는 소유를 위해 공을 던지는 야구 선수와 다를 게 무엇인가.
마음도 몸도 아프고 소외된 이웃이 있는지 살피기보다 음향과 조명을 맞추는 데 더욱 우선순위를 두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아닌, 세상의 근심거리요 조롱거리다.
교회의 외침은 마이크에 있지 않고 공의와 사랑의 십자가와 눈물에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