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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완 목사 영암벧엘교회 |
웨슬리를 변화시킨 올더스게이트 사건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이었다면, 이 체험은 웨슬리의 신학 형성에 있어서 루터적인 영향을 말해주는 것이다. 1738년의 회심 체험 이전의 웨슬리는 종교개혁 이전의 루터처럼 철저히 절망하였다. 옥스포드 신성클럽 시절 (1723년 4월)부터 클레이튼(Mr. Clayton)의 제안에 따라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금식하고, 몰간(Mr. Morgan)의 제안에 따라 일주일에 1-2 회씩 감옥과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웨슬리는 오직 ‘한 권의 책의 사람’으로 성경을 사랑하였고, 신성클럽은 ‘성경 벌레’ 혹은 ‘성경 크리스챤’(BibleChristian)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러한 열심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보다는 오히려 죄책에 빠졌다. 그러나 이제 웨슬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선행의 공적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신뢰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음을 고백하였다. 이제 웨슬리에게 있어서 의인화는 수동적으로 전가되는 은혜(imputation:extra nos)요, 이성적 사변이나 선행적인 노력으로서가 아닌‘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을 그의 구원론 기조로 삼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즉 인간의 선행이나 공적이나 행위로 얻는 구원이 아닌 믿음으로 얻는 루터적인 구원관의 뼈대가 형성된 것이다. 모라비안 형제단을 탁월하게 재편하여 이끈 리더는 진젠도르프(Ludwig Von Zinzendorf) 백작이었다. 그는 진실한 경건주의자였다.
그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을 일생의 목적으로 삼았으며, 자기가 창설한 형제단으로 하여금 구령운동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활동하였다. 헤른후트에 정착한 이들은 자신들의 옛 “연합 형제회”의 몇 가지 특징적인 모습들을 채택하기 시작했는데 이를테면, 회원들을 권고하고, 예배와 자선, 병자들의 심방, 그리고 영혼들을 돌아보고 인도하기 위하여 ‘돕는 자들’을 임명하였다. 그 구성원들은 나이, 성별, 결혼 상태 등에 따라서 나눠졌으며, 각 소그룹에는 그 구성원들이 스스로 뽑은 지도자가 한 사람씩 있었다. 이러한 소그룹(classes) 안에서는 구성원들이 서로의 영적 성장의 상태를 점검해 주었으며, 이들에 대한 분류는 전체적으로 두 개의 집단들로구분되었다.
하나는 성별, 나이, 결혼 상태에따라 분류된 집단들로 choirs이며, 이는 공동체가 점점 확장되면서 거주적인 형태를띠었다. 또 하나는 choirs 안에서 영적인 성장을 더욱 발전시키고자 원했던 사람들이작은 집단들을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밴드(band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