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6월이 오면 호국보훈의 의미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 특별히 올해는 민족의 비극 6.25전쟁 74주년을 맞는 해이다. 시간의 흐름은 참으로 빠르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다보면 오늘이 며칠인지 잊고 살 때가 있다. 그러나 해마다 6월이 오면 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나라를 지키다 순국하신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즉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충성과 넋을 기리는 달이다.
말 그대로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분들의 공훈에 대해서 보답을 하고, 나아가 나라의 의미에 대해서 되새기는 달이다. 독일의 통일을 이루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통일도 이루실 줄로 믿사오니 분단 된지 79년이 된 이민족에게 통일을 허락하여주옵소서. 5.000만 민족이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소리 높여 노래합니다. 나라의 흥망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우리민족의 간절한 기도 들어주시옵소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우리나라 국민들은 남다른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 통일이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1989년 라이프치히의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평화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여행의 자유”를 요구 했다. 이와 함께 같은 해 5월부터 동독 여행자들이 서독으로 탈출하기 시작했고,1989년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나서는 일반인들까지 서독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평화 시위대의 구호는 “언론의 자유”“자유선거”그리고 “우리는 한민족이다”였습니다. 12월3일에는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이 해체 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이듬해인 1990년 5월 화폐통합 협약 등 경제와 사회 통합으로 이어졌고 그해 10월 3일에 마침내 독일 통일이 선포 되었습니다,
1990년 10월3일에 과거 독일민주공화국에 속하던 주들이 독일연방 공화국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실질적으론 멸망한 독일민주공화국의 영역을 독일연방이 흡수 통일한 것이다. ‘재통일’이라는 단어는 1871년 독일 제국의 성립(독일의 통일)과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독일의 분단배경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네 개의 점령지역으로 나뉘었으며, 연합국에 의해 독일이 분할된 원래 목적은 독일이 다시 결합하지 못하게 하여 전쟁을 도발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냉전의 영향으로 프랑스·영국·미국의 점령 지역은 독일 연방 공화국이 되었고, 옛날 소비에트 연방의 점령 지역은 동쪽 지역의 일부가 폴란드 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으로 흡수된 후, 공산 국가인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었다.
이로써 동독 주민들은 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공산주의 체제를 받아들여야 했으며, 1949년 외세에 의해 분단되어 정부가 수립된 두 개의 독일은 서로가 독일 연방의 적법한 계승자라 주장하며 경쟁했다. 독일의 통일은 1952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처음으로 제안했다. 이는 폴란드와 독일 사이의 국경인 오데르-나이세선 서쪽의 독일을 중립국으로 만들며 모든 군대를 1년 안에 철수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끄는 서독 정부는 국제적인 주도 아래의 선거를 열어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이를 거부했다.
스탈린은 또한 독일이 바르샤바 조약을 받아들여 중앙유럽 위성국으로 남는다면 1937년 기준의 국경선을 보장해 주겠다고도 제안했었다. 독일민주공화국 정부는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을 금지했으며, 1961년 베를린 장벽을 세웠다. 또한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고 하는 동독 탈출자들에게 총격을 가해 사살하였다. 서독(독일연방공화국)의 동방정책 처음에 서독과 NATO 동맹은 할슈타인 독트린에 따라 독일민주공화국 (동독)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1969년 수상으로 취임한 빌리 브란트의 화해 정책인 동방 정책으로 서독은 동독을 포함한 유럽 공산국가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갔다.
당시 빌리 브란트는 제2차 세계 대전 피해국가 폴란드를 방문하여 전쟁 희생자 비석 앞에 직접 무릎을 꿇어 화제가 되었으며, 독일 민주 공화국을 방문하였다. 이러한 화해노력으로 양측은 1974년 외교 관계를 수립할 정도로 관계가 좋아졌으며, 전쟁 대립 의지가 없음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하지만 구 소비에트 연방과 더불어 냉전의 선봉에 서 있던 미국과 서독 내 보수층들은 반공주의 이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국가들과의 화해와 대화를 통해 이념대립을 극복하려는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독일의 통일은 기도로 이뤄졌다. 독일 통일의 시발점이 된 사건들 중 하나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1989년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에 모인 촛불 기도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종교개혁 훨신 이전에 1058년 전 1165년에 세워져 중세 상인들의 수호성인 성 니콜라이에게 봉헌된 성당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정권에 대항해 월요일마다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열렸던 ‘월요데모’는 1990년10월3일에 베를린장벽을 무너뜨린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밖에 참석하지 않은 조용한 기도회로 시작되었습니다. 구동독의 경찰이 위 촛불 기도회에 참석한 이들을 검거하여 이 평화로운 집회를 통제하고 차단했다.
그러나 참석자들의 수가 차츰차츰 많아져 나중에는 매주 십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와서 민주주의, 선거와 여행의 자유, 독일 통일을 요구하며 거리를 행진하는 거대한 행사가 되었다. 1989년 10월9일 촛불 기도회를 계속한다면 유혈 진압을 감행하겠다는 당국의 발표가 신문에 실렸다. 군대, 전투 경찰, 사복 경찰들이 이 교회를 에워싸고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촛불 기도회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조용히 진행되었다. 당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요 옛 동구권 지휘자의 지존인 쿠르트 마주어의 호소문이 발표된 후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성 니콜라이 교회 밖으로 나갔다. 뜻밖에 광장에는 수천 명이 이미 촛불을 들고 모여 있었던 것이다. 군대, 전경, 사복 경찰들은 그들의 기도에 감화되고 찬송이 울려나오는 거룩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군중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대규모 평화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구동독 전역으로 퍼져났다. 이처럼 성 니콜라이 교회는 독일 통일의 기치를 처음 올린 역사적인 교회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성경에는 두 개의 막대기가 하나 되는 비유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두 개의 막대기처럼 갈라진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이 결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분단된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지기를 기도해야합니다. 1989년10월7일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월요일의 데모를 비롯하여 동독 정부에 대항하는 많은 데모가 이루어졌는데, 당시 동독 국민들은 “우리가 국민이다. 권력은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의 것이 아니다.”라며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다. 1989년11월 베를린 시위 때에는 우리는 한 국민이다.라며 독일통일을 요구하기도 했다. 1989년11월 9일에 국경제한이 풀리자 많은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을 통해 서베를린에 갔으며, 동·서베를린을 가로막던 검문소가 없어졌다.
1990년 5월 6일 자유비밀선거를 약속하였으며,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에 따라 1990년 3월18일 동독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SED(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의 1당 독재가 폐지되었다. 이렇듯 동독사회에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불면서, 동독시민이 대량 이주하여 공공시설, 학교, 병원 등은 마비되었고, 국민을 감시하던 슈타지 (동독 국가보안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저항으로 슈타지 기관들은 습격당했으며, 슈타지에 의한 감시가 없어졌다. 동독은 독일 통일을 위해 서독, 영국, 프랑스, 미국, 소비에트 연방과 협상을 했다. 동독 지역에 NATO 군이 주둔하진 않는 것을 전제로 합의 되었습니다. “이정성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 일은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오라” 목매어 노래 불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