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바보야
전쟁이 터졌다. 그날은 한여름을 연상케 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곧장 공생원(共生園) 앞바다로 달려갔다. 너무나 더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땀에 찌든 몸을 바닷물로 씻어냈다. 차가운 바닷물에 닿은 온몸이 순식간에 싸아하니 시원해졌다. 물놀이를 신나게 하고 기진 맥진하여 물가로 올라왔을 때는 입고 있던 팬티 한 장 마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홀랑 팬티를 벗고 모래밭에 주저앉은 나는 열심히 팬티를 쥐어짰다. 주루룩 바닷물이 떨어졌다. 불과 여덟 살인 나에게 부끄런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어느덧 꽤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았다.
‘이젠 슬슬가봐야지.’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팬티를 주워 입었다.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공생원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뭔가 마을 공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동네 사람들이 줄을 지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양손에는 보따리를 잔뜩 거머쥐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야말로 총출동이었다. 뒤처지는 아이를 꾸짖는 듯 날카로운 외침소리가 웅성대는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겁먹은 얼굴로 이제 막 바다로 나온 철(喆)이 형에게 물어보았다.
“형, 지금 사람들이 모두 어디 가는 거야? 무슨 일 생겼어?”
“피난 가는 거야.”
“피난? 왜?”
“자아식. 그것도 모르냐? 전쟁이 터졌어. 전쟁이.”
“전쟁?”
나는 입으로 중얼거렸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생원에는 외부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라디오가 없었다. 더욱이 이제 겨우 여덟 살인 어린 나로서는 전쟁이 뭔지, 또 전쟁의 조짐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철이 형이 생기 있는 눈으로 느닷없는 제안을 해 왔다.
“기, 우리 아버지가 돌아오실지 못 오실지 내기할까?”
“내기? 어떻게?”
“여기다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이 돌을 던져서 돌이 원 안에 들어가면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거야.”
철이 형은 발끝으로 재빨리 원을 그렸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직경 1미터쯤되는 원이 있다.
“난 안 해. 형은 엉터리야! 아버지는 분명히 돌아오실 거야 돈 많이 가지고 오신다 그랬어.”
나는 이 내기에 응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쩐지 아버지를 배신하는 일이 될 것만 같았다.
“답답한 녀석 같으니라고. 임마! 전쟁이 터져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돈은 무슨 돈을 가져 오냐?
이 멍청아!” 하며 철이 형은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지지 않으려는 듯 대꾸했다.
“아버지는 오실 거야 약속하셨단 말이야.”
“지금 서울엔 공산군이 대포랑 전차를 밀고 쳐들어와 쑥밭이 됐어. 한강 다리도 폭삭 내려앉았대.
피난민들로 아우성이란 말이야.”
어린 나를 상대로 납득시키려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아버지는 어떻게 되지?”
“그러니까 모두 크게 걱정하고 있지.”
철이 형은 마을 사람들의 피난 행렬올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저 사람들은 목포보다 더 아래 지방으로 피난 기는 중이야. 개중에 돈 많은 부자들은 부산으로 간대.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일본이나 미국으로 건너간다더라.”
“그럼 우리도 배 타고 일본에 가면 되겠네?”
“아버지가 돌아오셔야 결정날 일이지, 내가 어떻게 알아?”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나의 어리석은 질문에 마침내 성미 급한 철이 형은 버럭 화를 내었다. 공생원의 형들은 비상시를 대비해 방공호를 청소하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형들의 작업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공산군 때문에 죄 없는 우리까지 사서 고생을 하는·구나. 이렇게 찌는 날씨에 작업이라니….”
형들은 한낮 폭염 아래서의 노동에 진저리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근데 말이야, 서울이며 대전도 모조리 공산군놈들에게 빼앗기고 이젠 놈들이 광주까지 쳐내려와 있다더라.”
“응, 마을 사람들이 그러는데 어머니 신변이 위험하대.”
“왜?”
“공산군은 일본 사람하고 기독교인을 특히 미워한대.”
“그럼 아버지도 큰일이구나.”
형들이 수군수군대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신변에 이상이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 했고, 나는 갑자기 안절부절 못하게 되었다. 나는 그 길로 원(園)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창문이란 창문에 온통 한지를 바르고 계신 것이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창가에 빙 둘러가며 다다미 병풍을 쳐놓았고 방바닥에는 이불이 깔려 있었다.
“어유 어두워 엄마, 왜 이러고 있어?”
어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으시며 말했다.
“기야 이제부터 엄마가 하는 얘기 잘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해둬야 포탄이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 거야. 다다미가 우리 몸을 보호해 주니까. 또 한지를 발라두면 유리가 깨져도 덜 위험하지. 이제부터 비행기 소리가 나면 바로 이 이불 속으로 숨어야 해. 알았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야릇한 두려움에 두 눈을 껌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