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독신문 애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시기 위하여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반드시 종교를 가져야 하는가? 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고, 어떤 이들은 종교를 하나의 인생 수양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종교를 번갈아 가면서 믿는 분도 있고 동시에 여러 가지 종교를 믿는 분도 있습니다. 또 종교를 갖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하나밖에 없는 법입니다. 여기도 저기도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리의 절대성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리가 있다면 상대적으로 진리 아닌 것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훈련받지 못한 사람, 즉 자연인에게는 진리가 아닌 것이 진리보다 더 찬란해 보이고 더욱 요란스럽습니다. 보석을 보아도 진짜 다이아몬드보다 가짜 다이아몬드가 더욱 번쩍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종교단체라는 이름을 가진 무리들이 많습니다. 저마다 진리라고 합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자 하는 이유는 수양의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은 원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므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 속에 있는데 죄로 인하여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조물주 하나님을 찾아 갈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저것 궁리하며 이런 종교도 믿어 보고 저런 종교도 가져 봅니다. 그러나 참다운 종교에 이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영혼이 갈급하여 여기저기를 방황합니다. 라디오의 다이알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바른 방송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른 다이알을 돌리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바른 다이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 힘으로 바른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종교란 무엇입니까?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면서 수양을 쌓기 위한 수단입니까? 아닙니다. 물론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의 ‘사서오경’이나 불가의 불경은 모두 철학으로서 사람의 수양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수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수양을 쌓지 못하는 이유는 좋은 책을 읽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악하게 태어납니다. 선하게 태어나는데 환경이 나빠서 악해 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령 햇볕이 내려 쪼이는 같은 땅에 두 그루의 나무가 나란히 서 있다고 가정합시다. 한 나무는 열매를 잘 맺는데 다른 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깁니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그 뿌리가 나쁘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좋은 수양을 쌓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금수같이 행동하여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모두 뿌리 즉 인간의 마음이 나빠서 그런 것입니다. 마음이 나쁘다는 말은 인간의 마음이 죄로 인하여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무제를 해결하는 일이 관건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하는데 마음이 새로워지는 길은 불가의 불경이나 유교의사서 오경이나 어떤 명작 수양 서적을 읽어서 되어 지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16세기 독일의 신학자)라는 분은 많은 책을 읽은 학자이지만 그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의식을 걷잡을 수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노력이나 고행을 해서 되어 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능해 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 로마서 1장17절이 그의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유명한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철학가인 ‘파스칼’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워 줄 수 있는 큰 구멍이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들이 갖지 못한 영혼을 갖고 있습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을 사모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떄문입니다. 그 영혼은 불멸입니다. 영혼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영혼은 죽을 때 하나님에게로 돌아갑니다. 몸은 흙으로 되어졌으니 흙으로 돌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몸은 죽어서 땅에 묻혔다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즉, 이 세상이 불로 심판받는 심판 날에는 그 몸이 다시 부활되어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영원한 축복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도 소중합니다. 몸을 학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육신도 영혼만큼 소중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생은 인격이 있고 인격의 3대 요소는 지(知) 정(情), 그리고 의(意,)로 되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타락한 후 우리의 인격, 즉, 지.정.의 가 모두 타락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판단의 기준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자신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수양을 쌓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 사람이 영원히 사느냐 혹은 영원히 죽느냐 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입니다. 수양만을 위해서라면 구태어 종교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좋은 책들을 읽으면 그것으로 목적을 충분하게 달성할 수 있습니다. 긍극적인 문제는 사람의 영혼이 문제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죽은 후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늘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철학도 연구해 보고 역학도 연구하지만 엉뚱한 곳에서 그런 중대한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기독교만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십니까? 다른 어떠한 종교도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혹은 어떻게 지음을 받았는지를 말해주는 종교가 없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뿐입니다. 유대교는 예수님이 ‘메시야’ 구세주 바로 그 분인 것을 모르고 배척하며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세상적으로 말해서 강력한 ‘맹장’이나 ‘명장’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나라를 로마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줄 그런 강력한 장군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서 로마 병정들의 손에 운명하시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대인들 중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과연 구약성경에서 예언했던 메시야 바로 그 분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에게 돌아오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 가고 있는 것은 퍽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다른 종교는 모두 인간이 어떤 믿음의 대상을 향하여 찾아 나아가는 종교입니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선행을 통해서 그 공로로 어떤 ‘신’의 은총을 받으려는 노력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적선’을 강조합니다. 천주교에서는 ‘고행’,과 ‘선행’을 강조합니다. 이슬람교는 절대적인 ’순종‘을 강조 합니다. “이슬람”이란 말 자체가 “순종”이라는 아랍어 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공로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반대로 하나님이 죄악에 빠져 죽은 인생을 살리시려고 먼저 손을 내밀면서 인간을 찾아 온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전도하다 보면 예상외로 많은 분들이 “나는 선행한 것이 없으니 천당에 가기는 틀렸다”라고 말합니다. 또는 “나는 계명을 다 지키지 못했으니 천당 가기는 글렀다”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람이 천당에 가는 일, 즉 영생을 얻는 것은 계명을 지키거나 혹은 선행으로 되어 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또한 “믿음이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즉 성경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에 “나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못한 죄인이다”란 겸손한 태도에서 출발합니다. 성경이 사람은 모두 절대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죄인인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죄”란 아주 무서운 것으로 “죄”의 값은“죽음”이라고 성경이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도 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원래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