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현리 선교사, 그의 집안 형제 자매는 무려 16명이다. 그의 부모는 모두 11남 5녀를 출산했다. 맹현리는 12번째 자녀이며 아들로는 9번째다. 이 정도면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에게 관심이 몰린다. 어떤 여성이 아이를 그리도 낳을 수 있나? 생육하고 번성하라지만, 좀체 쉽지 않은 일이고, 찾기 어려운 일이다.
어머니 엘렌(Ellen Douglas Jarnagin), 1841년 출생하였다. 엘렌 여사의 아버지는 테네시주 출신의 미국 상원의원 스펜서 자나긴. 멤피스에서 변호사 활동과 함께 정치 활동도 병행했던 자나긴은 주 상원의원에 이어 연방 상원의원도 지냈다.
자나긴의 자녀 7남매의 딸로 태어났던 엘렌은 21살이던 1862년 1월 28일 토마스 매컬리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 비슷한 시기에 남편이자 맹현리의 아버지인 토마스는 목사로서 채터누가제일장로교회 담임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해는 미국 남북 전쟁이 발발하던 때여서 미국 전역이 극한 고통에 시달렸다.
나는 1863년의 크리스마스를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밖은 모두 겨울이었습니다. 끔찍한 전쟁은 모든 것을 황폐화시켰습니다. 우리 교회는 병원으로 사용되었고,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의 집과 예배를 알리는 종소리가 공중에서 울리지 않았습니다. 주일학교, 주간학교도 없었고, 교회는 문을 닫았고, 나만 빼고 목사님들은 모두 사라졌고, 늙은 주민들은 남쪽으로 가거나 북쪽으로 보내졌고, 소수의 가족만이 남았고, 서로 만나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상점은 열려 있고, 어떤 종류의 시장도 없고, 거리에 마차도 없고, 공무원도 없고, 세금도 없고, 세리도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낯선 사람들이 우리의 거리와 고속도로와 집들을 가득 채웠습니다. 장교들의 마차와 군인들의 떠들썩한 소리와 마을은 천막으로 하얗게 뒤덮였습니다.
마침내 2월에 우리는 일요일 아침에 우리 집에서 예배를 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발표했습니다. 2월 첫 번째 일요일 아침에 우리 집은 주일학교 오르간을 사용하여 가득 찼고, 제 아내는 연주하고 사촌 Lizzie Hooke는 연주했습니다. 남은 소수의 노인들이 군인과 장교들과 함께 이 예배에 참석했고 시민들은 다시 한번 예배의 장소를 갖게 되어 기뻐했습니다(토마스 매컬리 목사)
맹현리의 아버지 토마스 목사와 어머니 엘렌 여사는 결혼한 그해 1862년 12월 첫 딸을 출산하였다. 그리고 연년생 출산 등, 거의 1~2년에 한 명씩 자녀를 낳았다. 마지막 16번째 막내딸을 낳을 때 어머니 엘렌 여사는 47세였다. 1915년 74세로 사망하였으니 그간의 건강 상황이 어떠 했는지는 모르나 비교적 장수하였다. 토마스 목사는 그보다 3년 전인 1912년 75세로 사망하였다.
자녀가 많다 보니 어렵고 슬픈 일도 많았다. 16명 자녀중 짧게는 2달 만에 사망한 아이부터 해서 모두 6명이 4살도 못되어 사망하였고, 또 두 명은 19살에 사망하였다. 자녀의 절반인 8명이 그나마 청년기 이후까지 삶을 살았는데 그들의 결혼과 자녀 출산도 참 부모와는 다르다.
세 딸 중 두 명은 평생을 미혼으로 지냈다. 딸 가운데 유일하게 결혼한 여성은 세 번째 쥴리아인데 20살에 실업가와 결혼하여 5남 1녀를 낳고 87세까지 살았다.
다섯 명의 장성한 남자 아이들은 초혼, 혹은 재혼까지 했음에도 자녀는 두 세명에 불과했다. 6남 스펜서가 3남 3녀, 6명으로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다. 그들의 부모는 모두 16명이나 낳았는데 자녀들은 한결같이 성장과 결혼, 자녀 출산에서만큼은 훨씬 못 미치는 인생을 보냈다. 장남으로 맹현리의 큰형인 토마스 스펜서는 목사가 되어 채터누가 중앙장로교회를 담임하였다.
채터누가 매컬리 학교, 목포 매컬리 학교
6남 스펜서와 8남 제임스는 아버지의 유업과 후원에 힘입어 채터누가 시내에 매컬리 인문학교를 1905년 세웠고 현재까지도 100여년 넘게 교육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매컬리 학교는 전형적인 미 남부의 흑백 분리주의를 따랐던 학교였다. 테네시 주 모든 공립 학교에는 흑인 아이들은 입학이 아예 허용하지 못하게 헌법에 명시할 정도였던 시대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매컬리 학교도 백인 남자 아이들만의 학교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흑인들이 조금씩 학교에 들어올 수 있었다.
목사의 자녀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를 표방했음에도 미 남부의 기독교 정서는 흑백 문제, 노예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전혀 성경의 가르침과 상반된 시절이었다.
매컬리 가문이 미국에 새운 매컬리 학교가 남학생들의 학교인 반면, 한국의 목포에도 매컬리 학교가 있었는데, 여학생들을 위한 학교였다. 목포에서 선교사역하던 맹현리는 미국의 가족들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매컬리 가문이 또한 목포의 학교를 후원하여서 학교 건물을 크고 멋지게 짓고 이 학교를 기부자의 이름을 따 ‘매컬리 학교’라 하였다.
1903년에 시작한 목포 남녀 기독학교, 이 가운데 남학교는 1909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스파탄버그제일교회의 기부로 건물을 짓고 대표 기부자의 이름을 따 ‘존 왓킨스 학교’라 하였고, 여학생들을 위한 학교 건물이 1923년에 신축되었을 때 역시 기부자 이름을 빌어 ‘매컬리 여학교’라 하였다.
매컬리 집안에서 1만 달러를 목포여학교에 기부한 이는 그레이스(Miss. Grace Eliza McCallie, 1865~1918)다. 그레이스 양은 집안의 둘째 딸이었는데, 언니인 장녀가 19살에 일찍 죽자, 이후 집안의 사실상 장녀로 지냈다. 맹현리보다 16살 위인 큰누나였다.
그레이스 양은 1905년 남동생들이 매컬리 남학교를 설립하자 이듬해 1906년 친구들과 함께 여학생을 위한 학교(Girls Preparatory School)를 세웠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1918년 53세에 사망하였을 때, 그의 가족들이 목포에 그녀의 이름으로 헌금을 보내 학교를 짓게 하였다. 아마도 그녀가 죽기 전 형제들에게 자신의 유산을 남동생 맹현리가 사역하는 목포의 여학교를 위해 쓰도록 부탁했으리라.
엄밀하게 따지자면 목포여학교는 매컬리기념여학교라 하였으니 이에 상응하는 채터누가의 학교는 남학생을 위한 매컬리학교가 아니라 여학생을 위한 학교(GPS)가 더 정확할 듯하다.
상당기간 목포의 여학생들을 위해 사용된 매컬리 학교는 지금의 정명학교다. 1970년 즈음 신증축하며 옛 모습은 바뀌어 있어 보이지만 그 기초와 뼈대는 남아있다. 오늘날 정명학교의 역사와 발전에는 이처럼 매컬리 집안과 미국 교회, 선교사들의 헌신에 기초한 것이다.
아들로는 9번째였던 헨리 매컬리(맹현리)는 1907년 내한 선교하며 1909년 에밀리 코델과 결혼하였다. 선교사로는 후배였으나 신부는 36살, 신랑 맹현리보다 8살 연상이었다. 그들은 1911년 딸을 낳았는데, 이후 자녀는 얻지 못했다. 무남독녀 외동딸 엘리스는 자라서 결혼을 두 번이나 했는데도 자녀를 낳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맹현리의 직계 후손은 없는 셈이다.
토마스 목사와 엘렌 사모. 16명의 자녀를 낳은 것 만큼이나 슬픔과 고통의 시간이 참 많았으리라. 죽어 나가는 여러 자녀들의 장례를 치르면서도 살아 나름 성장하며 자라가는 다른 자녀들을 양육하고 지켜보며 가정 사역과 함께 목회와 교육, 선교 운동에 헌신하였던 그들이다. 출산율의 퇴보로 미래 사회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 속에서 여러 자녀를 낳아 기르며 충성했던 복된 자, 맹현리 부모와 그 자녀들의 복된 삶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