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는 신비로운 일들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식물의 ‘꽃가루받이’이다. 다른 말로 ‘수분’(受粉)이라고 한다. 꽃들이 달콤한 ‘꿀’을 준비한다. 그러면 꿀벌이 그 꿀에 끌려 ‘꽃’을 찾아온다. 꿀을 먹고 가져가면서, 몸에 꽃가루를 묻힌다. 그리고 이 꽃 저 꽃을 다니며 꽃가루를 옮긴다. 그러면서 꽃가루는 암술로 전이되어 ‘수정’이 이루어지고 ‘열매’가 맺어지게 된다. 꽃은 ‘벌의 도움’ 없이는 번식할 수가 없다. 벌도 역시 꽃이 주는 ‘꿀과 꽃가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서로 의존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이 또 있다. 동물과 사람은 식물이 맺는 ‘과일’을 먹는다. 꿀벌이 모아온 ‘꿀’도 먹는다. 결국 ‘수분’(受粉)의 과정을 통해, 생태계 전체가 유익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식물학자가 이런 현상을 ‘나눔의 원리’로 설명했다. 꽃은 ‘꿀’을 나누고 벌꿀은 ‘꽃가루’를 나눈다. 수정을 통해 꽃은 더 많은 ‘꿀’을 나누고 ‘열매’를 나눈다. 그러면 인간과 다른 동물은 받기만 할까? 열매를 따먹는 인간과 동물은 ‘식물의 성장’을 촉진시킨다. 열매를 그대로 두어서 썩도록 하는 것보다 열매를 따먹을 때 식물이 더 건강하게 자란다고 한다. 그러니 인간과 동물은 식물에게 ‘건강’을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의 배설물을 통해 ‘양분’을 나눈다. 자연계가 ‘나눔’을 통하여 아름다운 성장과 균형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나눔은 ‘사랑’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랑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나눔’이라고 할 수 있다. 나눔을 통하여 사랑이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대표적이다. 하나님은 나눔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6일째 되는 날 ‘사람’을 만드셨다. 그러면 그 전에 5일간은 무엇을 하셨나? 사람이 살아가기에 좋은 ‘최적의 환경’을 만드셨다. 빛을 만드시고, 하늘과 바다와 강물과 식물, 그리고 동물들을 만드셨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그런데 하나하나 살펴보면 6일째 되는 날 지으신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환경으로 만드셨다. 우리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누어주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을 나눔을 통해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도 나눔이었다. 자신의 ‘몸’을 나누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생명’도 나누어주셨다. 나눔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건강해진다. 나눔을 통하여 아름다운 성장과 균형이 이루어진다. 나눔은 하나님께서 보이신 사랑의 표현 방법이다.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했다.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적용하며 뒤에 나온 내용만 강조한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2가지 명령이 담겨있다. “말과 혀로 사랑하라! 그리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라는 말씀은 “말과 혀로도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말과 혀로’ 사랑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의 뜻을 곡해하는 교인들이 많다. 이 말씀에는 다음의 2가지 명령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말과 혀로 사랑하라! 사람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착각이 있다. 뭔가 ‘큰 것’을 주어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물질을 많이 주어야 ‘많은 사랑’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선물을 해도 2만원 짜리 가방보다는 ‘명품’을 선물해야 많은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여긴다. 누구나 그렇다. 기왕이면 비싼 것을 선물 받으면 좋아한다. 그런데 그렇게 큰 것을 주어야만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작은 것으로도 큰 감동을 줄 수 있고 깊은 사랑이 전달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말’이 그렇다. 말을 통해 ‘마음’을 줄 수 있고 ‘따뜻한 격려’를 줄 수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가 ‘사랑’에 목말라 있다. 그 사랑의 목마름을 물질로 대신하려 하고 돈이나 값비싼 선물로 채우려 한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돈만 잘 벌어다 주면 내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아내는 밥만 잘 차려주면 내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랑의 갈증’은 더 커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말과 혀로 사랑하라!” 사랑의 말을 많이 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단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말을 많이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상대방이 사랑을 ‘느낄만한’ 말을 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만한 말을 하라는 거다. 이런 말을 하려면 내가 아니라 ‘상대방’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말이 행하는 신비로운 역할이 있다. “내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내가 했던 ‘사랑의 말’이 내게로 돌아와서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한다. 내가 했던 ‘축복의 말’이 내게로 돌아와서 나에게 복이 임한다. 이것이 말의 신비이다. 영혼과 육신이 건강하기를 원하신다면 ‘선한 말’을 입에 담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라! 보다 행복하게 살기 원하신다면 ‘사랑의 말, 남을 세워주는 말, 칭찬의 말, 감사의 말’을 많이 하시라! 몸이 아픈 분들에게는 더 많은 ‘기도와 위로의 말’이 필요하다. 이로 인해 우리의 삶이 ‘건강, 사랑, 축복’으로 풍성해지시기를 소원한다!
둘째,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 사랑을 ‘말’로도 해야겠지만 말로만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 나눔의 구체적인 방법은 크게 3가지이다. 1) 말(언어)이다. 말을 통해 상대에게 ‘만족감, 자존감, 기쁨’을 줄 수 있다. 2) 가진 것(시간, 물질, 재능)이다. 가진 것을 나누어 줌으로 상대의 ‘연약함,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 3) 영생이다. 상대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런데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누어주라고 했다. 성경에 보면 구체적인 예가 나온다. 약 2:15,16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형제 자매, 또는 교인 중에 돈이 없어서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먹을 양식이 없어서 배를 곯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 “평안하세요. 추워 보이는데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너무 힘이 없어 보이는데 밥 좀 잘 챙겨 드세요.”하는 말을 한다. 아주 고마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만 하고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러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다람쥐를 떠올리면 나눔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상기하게 된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모으기에 언제나 바쁘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다람쥐는 가을에 도토리를 부지런히 모아다 땅에 묻어둔다. 그런데 도토리 묻은 장소를 기억하지 못한다. 덕분에 다람쥐가 묻어놓은 도토리가 나중에 도토리나무로 자라난다. 그리고 다시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선물해 준다. 만일 다람쥐가 약아서 자기가 묻어둔 도토리를 전부 찾아 먹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산속에 도토리나무가 씨가 말라 결국 다람쥐도 굶주리게 될 것이다. 나눔의 속성이 그렇다. 나누고 나면 없어지는 것 같다.
약삭빠른 사람에게는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나중에 반드시 되돌아온다. 잠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다.
나눌 때 ‘사랑’이 이루어진다. ‘생명의 역사’가 나타난다.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넘치게 됨을 믿는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행복한 공동체, 교회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