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현대인이 앓는 질병은 대부분 ‘성인병’과 연관되어 있다. 성인병은 대개 40세 이상의 성인들에게 발생하는 만성적인 질병으로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심장병, 뇌졸중, 각종 암’을 포함한다. 식생활이 변화하며, 성인병에 걸리는 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인병은 ‘혈관’이 상하거나 막히면서 발생한다. 혈관이 막히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2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운동’을 많이 하는 것이다. 운동으로 근육에 탄력을 주어, 피의 흐름이 원활하게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뇌’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뇌의 통제를 받게 된다. 면역체계도 역시 ‘뇌의 명령’을 받아 통제된다. 의학박사들이 한목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이 정신관리를 제대로 하고 뇌가 건강하면 120-130세 까지는 살 수 있다.” 그러니 건강을 위해서 ‘뇌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정신 건강이 육체의 건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도 그렇다. 생활이 건강하려면, 영혼이 건강해야 한다. ‘영혼의 상태’가 건강한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생활’을 보면 알 수 있다.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혼의 건강’ 상태를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살아가는 생활을 보면 알 수 있다. 필자는 신앙 초창기에 ‘영혼과 생활’을 따로 구분하여 생각했다. ‘영혼과 생활은 별개’라는 이원론적인 생각을 했다. “영적인 건강과 생활의 건강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생활’도 건강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경 말씀의 내용을 보면, 우리 생활에 관한 것들이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섬기라, 인내하라, 복음을 전파하라...” 대부분 우리 생활 속에 적용해야 하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비윤리적으로 무질서하게 살면서 “내 영혼은 건강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착각이다. 그러면 영혼이 얼마나 건강한지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는 것일까? 있다. 영혼의 건강과 생활의 건강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영적으로도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하였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성령의 열매’라고 갈 5:22에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을 행하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속성 중에 가장 중요한 ‘베이스’가 무엇일까? 사랑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될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베이스’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된 것일까? 바로 ‘긍휼’이다. 사랑의 시작은 긍휼이다.
예수님께서 마 9:13에서 ‘긍휼’에 관하여 언급하셨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하신 말씀이다. 마태의 직업은 세리였다. 이 당시에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 이때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를 위해 일한다고 여겼다. ‘매국노이며, 로마의 앞잡이’라고 치부했다. 그런데 마태뿐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세리와 죄인들이 둘러서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러자 트집을 잡기 좋아하던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비난의 말을 했다. “너희 선생이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그러자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건강한 자’라고 여겼다. 실은 속이 병든 자들이었다. 누가 병원을 찾나? 누가 의사를 찾나? 병든 사람이 찾을까? 병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병든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병원을 찾는다. 자기가 병든 사실을 모르면 병원을 찾지 않는다. 그러다가 중병에 걸려서 조기 사망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책이 없다. 구원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빗대어 이 말씀을 하셨다. “너희처럼 건강하다고 하는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처럼, 자기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 쓸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하셨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긍휼’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먼저 영어에 나타난 의미를 살펴보겠다. 긍휼을 영어로는 ‘compassion’이라 한다. compassion은 ‘com’(함께) + ‘passion’(고난)의 합성어이다. ‘고난을 함께 당하는 것’이 긍휼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렇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지만 인간이 되셨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을 다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당해야 할 ‘죗값’을 다 치루셨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긍휼의 의미를 가진 ‘compass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공유할 때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될 때, 긍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긍휼의 마음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동정심과는 다른 것이다. ‘나도 함께’ 아파해야 긍휼의 마음을 가진 것이다. 불교의 ‘자비’와 성경에게 말하는 ‘긍휼, 또는 자비’는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뜻’을 가진다. 불교의 ‘자비’라는 단어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무아(無我) 사상을 바탕으로 즐거움을 주고 고통을 제거해주는 지극한 사랑을 의미하는 불교 교리” 불교에서 ‘자비’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뒤에 따르는 표현이 있다. ‘베푼다’는 표현이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넉넉하고 넓은 불심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자비’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마치 ‘적선’을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긍휼은 다르다. 긍휼의 마음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동정심과는 다른 것이다. ‘나도 함께’ 아파하고 ‘나도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긍휼’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셨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우리를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신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하지만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서 ‘긍휼’로 대하신다.
마치 부모의 마음과 같다. 자식이 아무리 속을 썩여도 자식은 자식이다. 부모가 속이 상하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야, 이 녀석아~ 그렇게 말을 안 들으려면 나가! 너 같은 자식은 필요 없어! 다시는 들어오지 마!” 그런다고 진짜 집을 나가서 안 들어오면 어떤가? “언제나 들어올까...”하고 날마다 기다린다. 이것이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이며, 동시에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고, 긍휼의 마음’이다. 필자가 오래전부터 고민하며, 답을 찾던 질문이 있다. “왜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나?”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부르셨나?”하는 거다. 40년이 넘도록 해오는 질문인데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고민 끝에 지금까지는 그래도 가장 만족스럽게 찾은 답이 있다. 바로 ‘긍휼’이다.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신 것이다. 왜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저를 긍휼히 여기셨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고멜과 같은 저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사랑해주셨다.
제가 ‘죄’ 가운데 사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불러주셨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우리를 부르시고, 품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조건을 따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긍휼’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의 역사’가 우리에게 풍성히 임하시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