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구에서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민주 정치의 이상理想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이 연설문을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미합중국의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Abraham Lincoln(1861-1865,재임)의 명문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명문은 링컨의 창작물이 아니다.
1380년 출판된 영국의 종교개혁자 존 위크리프의 구약 성경 서문에 최초로 등장한 뒤, 미국의 정치가 다니엘 웹스터 Daniel Webster에 의해 소개된 문장이다.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난 후, 1863년 11월 19일, 최대의 격전지였던 펜실바니아 주 남부 게티즈버그에 조성된 국립묘지 봉헌식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게 된 링컨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연설문의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긴 문장보다도 짧은 문장을, 라틴어에서 유래한 언어보다는 앵글로 색슨 언어에서 유래한 말을 찾아 전쟁의 동기와 게티즈버그 봉헌식의 의미를 최대한 집약적으로 살리고자 치밀하게 다듬었다.
심지어 연설 전날 밤 11시 쯤 완성한 연설문을 다른 숙소에서 묵고 있던 시워드 국무장관을 찾아가 초안을 보여 주면서 한 시간 가량 조언을 들었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연설문이었다. 참고로 시워드(William Seward)는 훗날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인 사람으로, 한 때 링컨과 라이벌이었던 정치가였으나 인격적으로 링컨에게 감복했던 인물이다.
봉헌식은 엄숙히 거행되었다. 링컨 대통령의 연설시간은 단 2분, 272개 단어로 짜여진 짧은 연설은 그곳에 참석했던 9천 명의 가슴을 숙연케 했다. 도하 선문은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격찬했으며, 게티즈버그 연설을 연구한 게리 윌스는 “이 연설은 링컨의 필생에 걸친 신앙의 소산이며, 10년 간 생각해 온 정치철학을 정리한 결정체”라고 하였다.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국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미합중국은 “국민의 정부,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라는 구절이 들어 있음을 볼 때, 왭스터의 “국민을 위해 만들고, 국민에 의해 만들어진,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링컨이 대통령으로서 얼마나 신봉하고 실천했으며 오늘의 미합중국이 있게 하였는가, 그의 진실성을 가늠케 한다.
우리 대한민국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이 조항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국체(國體)를 헌법에 명시한 국가는 지구상에 우리 나라가 유일하다.
한 걸음 나아가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의 나라’의 권리장정은 너무도 엄숙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으로 창조된 인간의 기본권과 존재 이유를 함의하고 있는 조문 그 자체가 경이롭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단군조선 창건 이래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제국에게 주권을 빼앗긴 1910년 8월 29일 월요일, 경술국치까지의 반만 년 <지배자의 국가>가 불과 9년 후, 1919년 기미 3·1독립운동을 분기점으로 그 해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 곧 <국민의 나라>로 국체를 치환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가히 혁명적이다. 국권 회복을 위해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에 임했던 애국지사들의 활동 지역의 정치 체제와 환경에 따른 사상적 이견으로 나라의 터와 틀이 되는 헌법 제정을 이루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으나 3·1독립선언서의 핵심 가치를 반영하여 1919년 4월 11일, 왕정 <지배자의 나라>에서 주권재민의 <국민의 나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그 실현의 동기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우리 나라가 해방되어 광복과 동시에 승전국 미국과 소련이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분할 통치하는 또 다른 분단의 비극을 맞이했다.
남한은 미군정에 의한 자유민주주의가, 북한은 소군정에 의한 공산주의가 국체로 형성되어 갔다. 1947년 9월 21일 유엔총회 운영위원회는 한국 문제에 관한 미국의 조선을 독립시키자는 제안을 12대 2로 가결하였다. 마침내 유엔총회는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는 한국 독립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43대 0으로 가결했다.
유엔 한국위원단(호주 등 8개국)은 1948년 1월 8일부터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서울에 입국하기 시작했지만, 소련은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했다. 한국위원단은 남한의 지도자들과 면담하였다. 이 면담에서 김구, 김규식은 남북 정치지도자회담을 열어 남북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하나의 국가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이승만과 한민당계는 우선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 뒤 점진적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엔한국위원단과 주한미군사령부 미군정은 선거법을 확정함과 동시에 선거 날짜를 5월 10일로 확정 실시했다. 정부 수립은 민주공화제의 주권재민 원리를 따라 보통선거에 의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고, 국회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가 당선되었다.
제헌국회는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여 국가의 기틀이 되는 헌법을 제정하여 7월 17일 만방에 공포하였다. 제헌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 체제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는 바,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문 그대로였다.
제헌헌법은 정치적 측면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요소를, 경제적 측면에서는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담음으로써 전체적으로는 양자를 절충하고 조화시키면서 공공복리를 중시하는 ‘공화주의’적 지향을 보였다. 나라의 틀을 세우는 사명으로 임기 2년의 선출직 제헌국회는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독립운동가 이시영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헌법에 <국민>의 기본권이 완벽하게 담겼다 할지라도 그 법과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는 선출되거나 임명직의 몫이다. 당시 거의 모든 정치세력이 친일파 처단을 역설하거나 그것에 동조하고 있는 상황에 오로지 이승만과 한민당만이 친일파 처단을 반대하였다.
따라서 친일파는 통일정부가 들어서면 자신들이 단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승만 추종에 목숨을 걸 정도로 매달렸다. 특히 이승만은 주민들의 원성의 표적인 친일 경찰에 각별히 관심이 컸고, 친일 경찰은 자신들을 보호하고 키워 주기만 하면 일제한테 충성했던 것 이상으로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과시증이나 독재 권력의 도구였다. 대구폭동사건으로 불리는 10월 항쟁이나 제주 4·3봉기의 근저에는 경찰에 대한 증오심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대구 폭동 당시 가장 격렬하게 일어난 경북에서 경찰관 40여 명이, 그것도 참혹하게 살해 당한 사건이 하나의 예이다.
5·10총선에서 당선된 소장파 국회의원 15명을 ‘남로당 프락치’라는 명목으로 구속하고 고문을 자행한 공안 사건 역시 훗날 조작 사건으로 판명되었다. 대통령은 <국민>을 통합하고 <국민>의 생명과 삶의 안정을 도모해야 할 책무를 부여 받은 직인데 이 대통령은 헌법 정신을 망각하고 자기 권력 확보를 위해 친일 경찰을 부추겨 정적 제거의 도구로 삼았다. 제주 4·3사건 때나 여순사건 때, 이 대통령은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국민>을 약 잡아 보았다.
6.25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 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국회의사당에 경찰병력을 투입시켜 반대파 국회의원들을 무력으로 제압, 감금한 가운데 변칙적 불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 뿐이랴! 1954년 정·부통령의 임기 4년, 2회 연임만 가능했던 대통령 임기 제한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자신에 한해) 종신제로 한다는 개헌안을 발의, 개헌 표결 결과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 무효 1명,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부결된 다음 날, 법무부 장관은 0.333···이라는 숫자는 독립된 주체로 볼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四捨五入의 논리로 135표만으로도 개헌선인 정족수 2/3에 도달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렸고, 자유당은 이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키게 된다.
이로써 이승만은 1956년 3선 대통령에 오른다.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이었는데, 만약 82세인 노 대통령에 유고가 발생하면, 부통령이 자연 승계하는 제도인지라 이를 막기 위해서 자유당은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내세운다. 원래 5월 15일 선거일인데 농번기라는 핑계로 두 달을 앞당겨 3월 15일로 변경하고 여당과 정부가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이 당선된 것이 저 유명한 3·15 부정선거이다. 이것이 4·19혁명으로 폭발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이기붕 가족은 자살) 하와이 망명 중 1965년 7월 19일 사망하였다.
자신의 권력의지에 맞춰 헌법을 유린하고 <국민> 억압일변도로 폭정한 이승만 독재 통치 기간에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것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역사의 교훈이 그대로 나타났었기에 4월 혁명의 구호가 말해주듯 “이승만 독재 타도”, “부정 축재자 단죄”가 역사를 바꿨던 것이다.
이승만의 자유당이 붕괴 후, 허정(許政)과도 정부가 제2공화국인 장면(張勉)정부를 탄생시켰는 바, 제1공화국의 대통령 중심제의 폐해를 경험한 <국민>은 의원 내각책임제 헌법을 국민투표로 정했다. 국회는 참의원, 민의원 양원제로 구성되었으며, 내각의 행정수반 국무총리로 장면 부통령이 선출되었다. 장면 총리는 성실성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적인 사회정책과 정부 주도형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시행에 착수했다. 1950년대에 사회 영역이 관권에 지배받아 각종 사회단체 또는 이익단체는 자율성을 잃은 가운데 관권 선거에 동원되었지만, 이승만 정권 붕괴 이후 장면 정권에서는 공권력 남용이 사라지고 사회 전반에 걸쳐 자율성이 확대되었다.
그만큼 공공성이 제고되고 법치주의가 영역을 넓히면서 그간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정신적·지적·사상적 영역이 활기를 찾고 확대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민주당의 신파(장면 총리)·구파(윤보선 대통령)가 정쟁에 휩쓸리면서 분당의 아픔을 겪게 되는 한편, 언론의 자유는 언론의 범람과 횡포를 낳았다. 기존 신문은 물론 신간 언론까지 장면 정권을 무능 정권으로 매도하는 여론 분위기를 타고, 박정희 소장, 김종필이 일으킨 5·16쿠테타가 성공함으로써 제2공화국은 9개월 만에 막을 내렸고 민주주의 헌정 질서는 중단되었다. 하지만 혁명정부는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 플랜을 그대로 시행하여 국가 경제를 이룩했다. 그러나 필자가 경험한 1970;80년대 인권이 부정된 한국 사회는 산이 산으로, 나무가 나무로,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는 사회가 아니었다.
‘개발 독재’를 위한 유신헌법은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 반하는 뒤틀린 악법이었기에 어쩌면 10·26유고는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유신헌법은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쿠테타’로 이어지다가 1987년 6월 항쟁으로 개헌된 헌법이 현행 헌법이다.
요즘 들어 이승만 국부론을 넘어 신격화 작업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국론 띄우기가 현 정부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언론 보도는 한 시대 이들이 <국민>을 억압했던 파시스트였음에도 <국민>의 양심과 이성을 적대시하는 자폐증적 역류행위를 서슴치 않는다고 탄식한다면 과한 반응일까?
「나」 하나가 나라이며 국민이다. 위정자여! 우리 대한민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진정한 <국민> 주권자의 나라이다. 주님! 앞으로의 역사는 헌법전문에 입각하여 <국민>주권에 상응하는 통치자로 나라 사랑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