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저자 윤문지(타우치 후미애)
공생복지재단 이사장
-1949년 일본 오사카 출생
- 쿄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
- 1972년, 한국 목포로 건너와 목포공생원 생활지도원 역임
-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마음의 가족」 이사, 사회복지법인 윤학
자공생재단 이사,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제3회 여성휴먼다큐멘터리 대상에《양이 한 마리》로 입선
- 1982년《나도 고아였다》로 일본 크리스천신문 제5회 아카시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
제1부 어머니는 바보야
“암요. 우린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가 아닙니까? 또 윤 원장은 제 선배님이시니 그 정도의 심부름은 마땅히 해 드려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부인?”
이렇게 고마운 일이 어디 있을까? 어머니는 감격했다. 마음속으로 남편에게 말하고 있었다.
“여보. 이젠 됐어요. 사 목사님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기로 했으니 당신의 공생원은 이제 훌륭하게 재기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어머니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배신의 와중에서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고아와 피난민들은 급격히 불어나 숙사가 부족했다. 숙사 마련이 시급해졌다.
공생원에서 해안을 따라 3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서산동이 있다. 옛날엔 꽤 번화한 거리로 일본인의 유곽이 있었는데, 그곳을 목포시가 공생원에 매각했다. 대반동 소재의 공생원을 제1숙사로 칭하고 새로 매각한 서산동 숙사는 제2, 제3숙사라고 이름 지었다.
사 목사는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란 단서로 대리 원장에 취임하여 초반기엔 무척 열성을 보였다. 사 목사는 아버지와 오랜 친구로, 어머니가 당시 가장 신뢰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원아들이 학교 근처 서산동의 제2, 3숙사로 옮기게 되자 그는 제1숙사인 공생원에 발길을 줄이기 시작했다.
부산(당시 임시 수도)에서 열리는 원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장을 갔던 사 목사는 돌아오고 나서도 공생원에 나타나지 않았고 어머니에게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너무 무리하셨는지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삼일 뒤에는 들르시겠죠.”
범치 형이 말했다.
“그러면 연락이라도 해 주지. 부산에서 돌아온 지 벌써 한 달이나 됐는데 매일 식량과 일용품을 운반해 오는 사람 편에 한마디 소식이라도 보내주면 좋으련만….”
사 목사가 원장으로 취임한 후부터 모든 보조금과 원조는 시내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서산동 제2숙사에 보관하게 되었고 어머니가 있는 제1숙사에는 필요한 물량만 배달되었다.
사실 감기몸살은 사 목사의 한낱 핑계였다.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사 목사의 저의를 간파하고 있었으나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어머니는 변함없이 사 목사를 신뢰하고 있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범치를 불러 사 목사를 방문하기로 했다.
범치 형은 어머니의 경직된 표정을 읽었다. 솔직히 현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 요즈음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제가 확인한 건 아니지만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공생원이 없어지고 유달원(儒達園)으로 바뀐다고 해요. 아이들 얘기니까 전적으로 믿을 수 없지만, 유달원 운운하는 걸 보면 심상치 않은 것 같아요.”
“유달원?”
유달원이란 이름을 되뇌는 어머니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범치 형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아이들 말로는 공생원은 함께 산다는 뜻이라서 어쩐지 공산당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거예요. 목포에는 유명한 유달산이 있으니까 구태여 공산당 냄새가 나는 이름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나요? 그래서 유달원으로 바꿨대요. 물론 사 목사님의 의견이셨나 봐요.”
어머니는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6·25 동란으로 남편이 공산당으로 몰려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이제 또 공생원의 이름으로 수난을 겪어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해지고 두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 진실을 확인해야만 한다. 사 목사는 주님의 종이다. 목사가 그런 일을 할 리 없다. 모두 헛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하여튼 사 목사를 만나야 했다. 어머니와 범치 형은 제2숙사로 갔다.
사 목사의 태도는 너무나 냉정했다.
“당신은 친구의 부인입니다. 동시에 일본인이지요. 일본 사람 손에 한국 고아를 맡겨도 좋을지 고민했습니다. 그럴 순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제 기분도 좀 이해해 주십시오.”
사 목사는 어머니의 가장 아픈 곳을 지적하며 모든 것을 단념하라는 것이었다.
‘역시 아이들의 이야기가 맞았구나.’
(다음 14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