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Colorado주 ‘스프링필드’에 가면 지형이 높고 험한 고갯길이 있다. 이 길은 차가 통과하기 어려워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는 곳이다. 지나가는 운전자들이 지레 겁을 먹고 돌아가기가 일쑤였다. 길 자체는 도시를 잇는 요충지였다. 위험한 곳을 보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운전자들이 왕래를 꺼리는 탓에 도로가 ‘폐쇄 위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표지판이 세워졌다. “Yes, You Can!”(그래요,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고 써 있는 표지판이었다. 그러자 고갯길을 지나던 운전자들이 표지판을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지레 겁을 먹던 예전과는 달리 “그래, 나도 할 수 있어!”하는 자신감을 가졌다. 지금은 누구나가 넘어가는 길이 되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는 글이 효과를 가져왔다.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이 달라졌던 것이다. 모든 일이 그렇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할 수 있다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고 할 수 없다고 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세 가지의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없다, 잃어버렸다,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살다 보면 ‘없는 일’이 왜 없겠나? 돈이 없을 수 있고, 차도 없을 수 있고, 집도 없을 수 있다. 살다 보면 ‘잃어버리는 일’이 왜 없겠으며 ‘한계’에 처할 때가 왜 없겠나? 분명히 있다. 그러나 말을 부정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더욱 그렇다. 없어도 “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잃어버렸어도 “잃어버렸다”고 절망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회복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내 능력이 부족해도 “한계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경에 인생의 장애물로 인해 힘겨워하던 여인에게 벌어진 축복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다. 왕하 4:1에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하였다. 이 여인은 선지자의 제자의 아내였다. 오늘로 말하면, 신학교에 다니던 전도사님의 사모님이었다. 엘리사는 선지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선지자학교, 다시 말해 신학교’를 운영했다. 엘리사가 ‘신학교의 학장’인 셈이다. 요즘에도 신학교에 가보면, 처자식이 있는 분들이 늦게 신학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사람도 그랬다. 그런데 그만 아내와 아들 둘을 남겨놓고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냥 죽은 것만 해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데 많은 빚을 남겨놓고 떠났다. 너무도 막막한 나머지 엘리사에게 찾아와서 하소연을 했다. 이 신학생 부인에게는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믿고 의지할 가장이 사라졌다. 둘째, 거기다가 많은 빚을 졌다. 셋째, 빚을 갚을 능력이 없어서 사랑하는 두 아들을 종으로 넘겨야 할 처지였다. 이어지는 2절에서 보듯이 이 여인의 집에는 ‘기름 한 병’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빚을 갚기는커녕 먹고 사는 일 자체가 막막했다. 그래서 꼼짝없이 두 아들을 채주의 집에 종으로 보내서 최소한 6년 동안은 종살이를 시켜야 할 형편이었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때 이 여인은 하나님의 역사가운데 모든 문제를 다 해결 받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2가지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첫째,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나에게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위급한 처지에 있으면, 나에게 불리한 상황만을 떠올린다. 없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상황이 더 나빠질 뿐이다. 위급한 처지에 있을수록, 나에게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나에게 남아있는 건강을 생각하고, 나에게 남아있는 가족을 생각하는 거다. 나에게 남아있는 교회를 생각하고, 언제나 나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 여인이 엘리사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자, 엘리사가 여인에게 뭐라고 말했나? 2절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 여인이 어떤 형편에 놓여있는지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안타까운 처지에 있는 제자의 아내를 돕고 싶었다. 돕고 싶은 마음으로 그녀에게 했던 첫 번째 요청이 무엇이었나?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는 것이다. 먼저 이 여인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리고 그 남아있는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때 여인에게는 ‘기름’이 조금 남아있었다. 그러자 그 기름으로 그 여인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만약에 그 여인에게 ‘밀가루’가 있었으면 밀가루로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고 ‘향료’가 있었으면 향료로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다. 엘리사는 “빚만 남아있고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그녀에게 “가진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너무나 중요한 원리이다.
하나님은 곧바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셨다. 엘리사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었다. 그래서 얼마든지 돈이 될만한 것을 만들어서 즉석에서 빚을 다 갚도록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인에게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하였다. 여인으로 하여금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중요한 원리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없는 것’을 보고 불평하고 절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을 보고 감사하며 희망을 갖는 사람을 쓰신다.
두 번째,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3절에 보면 절박한 상황 속에 있던 여인에게 엘리사가 이렇게 명령했다.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엘리사가 난데없이 그 여인에게 “그릇을 빌려오라”고 했다. 그것도 조금 빌리지 말고, 많이 빌려오라고 했다. 자식들이 팔려 나가고, 굶어 죽을 판인데.. 빈 그릇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성적으로 본다면, 이런 명령은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그릇을 빌려오면 그 그릇에 기름을 가득히 부어주겠다.”고 미리 말했으면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앞뒤 설명도 없이 그저 “빈 그릇을 빌려오라. 조금 빌리지 말고 많이 빌려오라”고 했다.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말하고, 해결책을 구하고 있는데 무조건 “그릇을 많이 빌려오라”고 하니 이게 웬 말인가? 하지만 그 여인은 순종했다. 이유를 알 수 없어도 엘리사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순종했다. 그리고 그릇을 많이 빌려왔다. 그러자 엘리야가 또 뭐라고 명령했나? 4절 “두 아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기름을 그 빈 그릇에 부으라.”고 했다. 이 말도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이었다. 왜 두 아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그리고 왜 문을 걸어 잠가야 하나? 우리야 결론을 알고 있으니까 별문제가 없지만 이 당시에는 하나하나가 의문투성이이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그대로 순종했다. 두 아들과 함께 안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나? 기적이 벌어졌다. 남아있던 그름을 붓자 기름을 아무리 붓고 또 부어도 멈추지 않았다. 부어도 부어도 기름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름이 언제 멈추었나? 마지막 남은 그릇에 기름을 붓고 나자 기름이 멈추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가 담겨있다. “축복의 크기는 순종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원리는 동일하다. 우리도 역시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어려움을 당하여 앞길이 막막할 때일수록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여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이 나의 문제 해결과 관계가 없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순종할 때 우리가 순종한 만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주의 말씀’ 앞에 한발 더 나아가시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