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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기 목사 상리교회 범사회문제대책운동본부 사무총장 |
‘나묭’이란 작가가 쓴 ‘두 얼굴의 명절’이라는 글이 있다. 이런 말로 시작한다. “7년 전 일이다. 어머니가 집안을 뒤흔들 선언을 했다. 결혼식을 앞둔 예비 며느리에게 ‘머지않아 제사를 없애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종가였던 우리 집은 두 번의 명절을 포함해 1년 중 일곱 번의 제사를 지내왔다.” 명절이 되면 오랜만에 가족을 만난다는 기쁨이 있다. 연휴 기간에 푹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어린아이처럼 며칠 전부터 기다려진다. 하지만 부담도 있다. 나묨 작가의 어머니처럼 제사 음식 준비에 대한 부담이 있다. 제사 음식이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 먹을 음식 장만에 대한 부담이 있다. 추석 선물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이 있고 거북한 만남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명절은 기쁜 날이면서 동시에 염려스러운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두 얼굴의 명절’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명절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기쁨의 날이면서 동시에 염려스러운 날이 이어진다. 우리 중에 ‘염려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약 절반은 ‘미래’에 대한 염려가 있다고 한다. ‘노후’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나이 들며 건강이 나빠지면 어쩌나.. 돈이 떨어지면 어쩌나..” 실상은 절반 정도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열이면 열 모두 다 염려를 안고 살아간다.
사람마다 염려하는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뿌리를 찾아 내려가 보면, 예수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위하여 염려한다. 몸의 ‘건강’을 위해 염려하고 ‘생활’ 문제로 염려한다. ‘생명, 안전, 건강, 생활’에 대한 염려는 ‘염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염려의 내용뿐 아니라, 염려의 강도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염려의 강도가 높아서 ‘심하게’ 염려를 하는 경우가 있다. 잠을 자면서도 염려한다. 어떤 사람은 ‘염려를 하는지 안 하는지’ 자신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염려의 끄나풀을 쥐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염려로 인해 고통당하고, 심지어는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통계청의 발표를 흥미롭게 분석한 자료를 보았다. 2022년의 통계를 보면, 한국에서는 매일 692명이 새로 태어났고, 매일 1036명 정도가 사망했다. 매일 344명씩 대한민국 인구가 감소했다. 사망자의 경우에 1036명 중에 암으로 매일 230명이 사망했고, 동맥경화로 39명이 사망했다. 매일 성인병(고혈압, 당뇨, 간질환)으로 57명이 사망했고.. 매일 37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교통사고로 10명씩 사망했다. 사망자 중에 ‘암, 동맥경화, 성인병,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363명이나 된다. 전체 사망자 중에 35%나 차지했다. 그런데 ‘암, 동맥경화, 성인병, 자살’이 염려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다. “염려는 인간을 서서히 죽이는 느린 형태의 자살 행위다.” 염려는 염려하는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살인마와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건강하게 살려면, 반드시 염려를 떨쳐버려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을 보면 염려라는 것이 아주 진드기처럼 사람을 괴롭힌다. 그러니 염려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극복을 해야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고만 하지 않으셨다.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도 말씀하셨다. 염려를 이길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이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하셨다. 이어지는 32절에서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하셨다. 32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를 밝히셨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들을 다 아신다는 거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어떤 분은 조금 의아해하실 수도 있다. “누군가가 나의 염려를 알아준다고 해서, 염려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에 대하여 뒷짐을 지는 분이 아니다. 나서서 도우시는 분이다. 아니, 모든 해결책을 미리 다 준비해두고 계신 분이다. 우리의 염려를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까지 다 해결해주신다.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치료해 주신다. 사람들과 얽힌 문제들도 해결해주신다. 자녀의 문제, 배우자의 문제도 하나님은 능히 해결해주신다. 막연한 미래와 노후의 문제도 하나님은 해결책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염려를 이기려면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염려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다. 믿음이 약해져서 염려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문제를 다 아시고, 다 해결해주심을 믿는다면 뭐가 걱정이겠나?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다. 기독교 작가 ‘헨리 나우웬’이 재미있는 표현을 했다. “염려는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염려는 ‘혹시’로 가득 찬 상태이다.” “배가 이렇게 살살 아픈데 ‘혹시’ 암에 걸린 게 아닐까..”하며 걱정을 태산같이 한다. “오늘 기분이 찝찝한데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는 거 아냐..”하는 근심어린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는다. “혹시 실직하지 않을까.. 혹시 망하지나 않을까.. 혹시 취업을 못 하면 어쩌나.. 학교 간 애가 아직 안 왔는데.. ‘혹시’ 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 이렇게 아직 내 앞에 오지 아니한 시간과 장소를 ‘의심’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염려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혹시’라는 생각이 내 마음에 자꾸 차 오르기 시작하면, 불안해지고 두려워진다. 의심이 많아지고, 탐욕이 생기고, 조급해지고, 나중에는 우울해진다. 병은 더 깊어지고, 상황은 더 악화되고 되는 일도 안 된다. 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염려’가 스며드는 것일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 사실을 알려 주셨다. 염려를 극복하려면,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다 아시느니라.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있다. 그 친구는 당시 거대세력이었던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개혁을 해나가며, 두려움과 걱정이 많은 친구였다.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염려하며 나약해지는 것은 문제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것이라네.” 그렇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크기가 커서 두려운 것이 아니다. 원인은 불신앙에 있다. 우리의 진짜 심각한 문제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가 얼마나 큰지가 아니다. 그 문제보다도 작은 내 믿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염려를 죄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염려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에 ‘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를 이기려면 믿음을 키워야 한다. 세상에 염려거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 염려거리가 두려움과 근심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어떤 염려거리도 정복해 나가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죠지 뮬러’가 말했다.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요,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다. 염려하면 믿음이 죽고, 믿음을 가지면 염려가 죽는다.” 여러분은 염려의 종이 되길 원하시나? 아니면 염려를 이기며 살기 원하시나? 바라기는 믿음으로 염려를 이기는 복된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