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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완 목사 영암벧엘교회 |
3. 페터 레인 신도회(Fetter Lane Society)
감리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개발은 웨슬리가 1738년 5월 1일에 런던서 설립한 페터 레인 신도회에서 발아(發芽)되었다. 웨슬리는 좌절감을 깊이 맛 본 선교사로서, 그러나 믿음에 의한 구원을 추구하는 심정을 가지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사무엘 호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는 선상의 적은 양떼를 영적으로 살피면서, 동시에 드 렌티의《생애》를 탐독하면서, 종교적 신도회의 중요성을 재확인했고 그이 책을 요약하여 출판하였다.
웨슬리가 열 명을 모아 작은 신도회를 구성하고 제임스 허튼(James Hutton) 가정에서 모였으나, 회원이 증가하자 그 집은 너무 비좁았다. 그리하여 사오십여 명의 신도회는 페터 레인에 있는 낡은 집회 장소로 옮겼다. 신도회의 회원들은 야고보서의 가르침을 따라“서로의 죄를 고며,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기 위해”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 모이기로 했다. 웨슬리는 피터 뵐러의 충고도 참작하여 신도회를 이끌어 갈33항의 규칙을 작성하였다. 이 규칙들은 신도회의 목적(제1항), 내적인 서클의 모임(제2-6항), 모임순서(제12-16항), 가입과 제적(제17항,32-33항), 기타의 여러 기능(제27-32항) 등으로 되어 있다.
존 웨슬리는 이 신도회에 1740년까지 함께 하였는데, 그 해에 그는 그 신도회로부터 결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 짧은 기간에 개인의 회심을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그 신도회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게 되었다. 회심의 경험은 전도, 교제, 평신도의 역할 등에 관한 웨슬리의 견해를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 이외에 몇 가지 독특한 특색들을 실험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웨슬리가 전도를 새롭게 강조하게 된 점이다. 그의 사역은 영혼의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설교는 이신득의(justification by faith)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의‘작은 교회’를 통한 전도 강조는 웨슬리의 성숙한 체제가 구성되었을 때 충분히 나타났다. 그뿐 아니라 이 신도회는 영국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그 회원권을 제한시키지 않았다. 이 사실은 얼핏 보기에 영국 국교회를 타협없이 옹호하는 웨슬리에게는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회원들에게 영국 국교회의 예배나 예식에 참여해야 된다는 의무 조항을 두지 않은 것을 볼 때 더욱 분명하다.
두 번째 특색은 종교적인 배경과 관계없이 모두를 포괄하는 교제였다. 이 신도회는 처음부터 서로 상이한 두 그룹, 즉 한 집단은 영국 국교회에 속한 영국인들이었고, 다른 집단은 모라비안 교제권에 속한 독일인들이었다. 이들은 서로를 보강하였다.모든 회원들은 웨슬리나 뵐러 또는 방문 설교자의 지도 하에 교제와 교훈을 위해 수요일 저녁마다 모여서 주중에 경험했던 영적 승리와 패배를 나누었다. 이 교제의 특색은 성숙한 조직체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세 번째 특색은 평신도를 조 모임이나 신도회를 위해 개발하고 사용했다. 평신도를 적절한 신학 훈련 없이 지도자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고는 웨슬리 당시에는 급진적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평신도들이 조지아와 헤른후트의 소그룹 교제를 통하여 영적 지도자들로 개발되는 것을
목격한 바 있었다. 웨슬리가 감리회의 성숙한 체제를 이루었을 때, 그 감리회의 성공적인 영향력의 열쇠는 소그룹에서 배출된 평신도의 활용이었다.
요약하면, 웨슬리는 복음적인 회심과 성도의 교제의 원동력을 경험하였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불타는 열정도 소유하였다. 역사적으로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로부터 영적인 도전을 받고 올더스게이트의 회심을 체험하게 된다. 웨슬리는 조지아 식민지를 향한 여행과 돌아오는 항해에서 두 번씩이나 풍랑을 만난다. 그 때마다 웨슬리는 죽음과 공포를 극복하며 평안을 유지하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경건한 자세에서 깊은 도전을 받았다. 모라비안 교도인 스팡겐베르그(Gottlieb Spangenberg)가“예수를 당신의 구세주로 믿는가?”라고 물었을 때 웨슬리는 확신이 없이“제발 그렇게 구세주이기를 바란다”는 불확실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얼마 후 뵐러(Peter Böler)는 웨슬리가 자신의 신앙의 결핍으로 설교에 자신이 없음을 탄식할 때, “당신이 믿음을 갖게 될 때까지 믿음에 대해 설교하라”고 충고하였다. 이렇듯 모라비안교도들의 영적 지원은 웨슬리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데 요긴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과 최종적으로 결별한다. 이유는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에 관한 문제였다. 이에 대해 케빈 라그리(K. Lagree)는 웨슬리의 모라비안 교도의 정적주의를 지적하기를, 모라비안 교도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성장의 도움이 될 그 어떤 객관적인 수단에 대하여 불신하고 있었다. 그들이 믿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 정적주의를 간파했고 이는 진정한 영적인 함양을 놓고 볼 때 부정적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예를 들면 모라비안들은 교회 출석을 중지하고 성서를 읽다가 기도하는 것을 그만두고 단지 앉아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다리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바로 이 정적주의가 웨슬 리로 하여금 성나게 만들었고 그것이 마침내는 웨슬리로 하여금 은총의 수단에 대하여 저술하게 하였으며, 이 저술이 나옴에 따라 그는 모라비안과 결별하게 되었다.
만일 웨슬리가 페터 레인 신도회와 모라비안 형제들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생애와 사역은 크게 제한되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이 신도회의 이중적 구조에서 소그룹 활동이라는 의미심장한 모형을 배웠다 하더라도, 웨슬리는 모라비안이 주도권을 잡고있는 페터 레인 신도회와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마침내 1740년 7월에 그 신도회를 떠났다.
[2025년 1월 22일 수요일 제33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