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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헌 목사 북교동교회 |
길을 잃는다는 것은 불행이다. 인생의 길에도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서면 비극을 당하게 된다. 인생은 길을 찾기 위한 행로이다.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에서 성공하는 길을, 학문하는 사람은 학문에서의 성취를 모색한다. 다행히 올바른 길로 접어든 사람은 성공하지만 잘못된 길로 들어선 사람은 실패한다.
수많은 사람이 길을 잘못 들어 자갈길, 가시밭길, 험한 길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낙심하고 절망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모른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어느 살인범과 나눈 대화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한번만 참았더라면”이라는 말과 “길을 잘못 들었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모든 사람이 그 많은 길을 오고 간다. 길 한번 잘 못 들면 인생 전체의 방향이 바뀔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의 길 한번 잘못 들어 평생을 우울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정치의 길 잘못 들어 높은 권좌에서 쫓겨남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장삿길 잘못 들어 재산전부를 날리고 파산지경에 이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학문의 길을 잘못 선택하여 평생을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는 길을 의식하며 가고 있을까? 그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도 무의미하게 자신의 길을 반복하며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왜 이 길을 가고 있는가?’ 또는 ‘내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를 물으며 살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일상성(日尙性) 속에 깊이 매몰되어 자신을 잃어버린 채 무의식, 무목적으로 실존을 망각한 채 살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이라고 했다.
지금 당신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분명히 인생은 어딘 가를 향해 가고 있는 존재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 어딘 가가 어디인지를 모른 채 가고 있을 뿐, 누구나 정지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살았다 하는 것이, 곧 움직이는 것을 말하고, 움직인다는 것은 어디론가 향해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향해 한발자국, 한발자국씩 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무식한 말이요, 무책임한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단순히 인생이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면, 너무나 무의미하고, 너무나 허무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가만있어도 때가 되면 찾아오는 법이다. 죽음을 향해 간다고 하기 까지는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란 것이다. 우리가 지금 숨을 쉬고 살았다고 하는 것은 어디론 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살았다는 말이다. 단지 그 가는 길이 어디인지 모르고 가는 인생이 될 때,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생활과 다를 바가 없을 뿐이다.
성경에 보면, 인생의 길을 잃었던 한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다(요 4:1-42). 예수님께서 어느 날 수가 성 우물가에 앉아 계셨다. 이때 한 여인이 우물로 물을 기르러 왔다. 그 여인은 다섯 번이나 이혼하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었지만 그의 내면의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어 고심하고 있었다. 이 사정을 아신 주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리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메시아(구세주, 구원자)임을 그 여인에게 가르쳐 주셨다.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과 그가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 분임을 알았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했다.
길을 잘못 들어 목말라 하던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 들이자마자 하늘가는 밝은 길을 보게 되어 절망과 낙심과 슬픔에서 해방되었다. 그러자 여인은 물 길러 왔던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갔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와 보십시오. 메시아가 오셨습니다”라고 외쳤다.
무엇이 인생의 길을 잘 못 들어선 여인을 바꾸었는가? 실의에 빠져 있던 이 여인이 이처럼 기쁨을 전달하는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므로 가능케 됐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개인적으로 얼마나 많은 여인들을 전도하셨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찾아가셔서 대화를 통해 구원하신 예는 이 여인의 사건 밖에 없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지나가시다가 사마리아를 찾아오셨는데 여자 하나를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갈릴리에서 사마리아까지 그 길이 얼마나 먼 길인지는 모른다. 새벽에 예루살렘을 출발하여 정오에 수가성에 도착하셨다. 적어도 4-5시간 햇빛을 받으며 걸어오셨다. 이름도 밝힐 수 없는 이 무명의 여인을 위해서, 세상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생활도 깨끗하지 못한 여인 하나 구원하기 위해 그는 끔찍한 사랑을 가지고 수가라는 마을을 찾아오신 것이다. 이런 사랑을 어떤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 공자, 불경에서 찾을 수 있는가? 더구나 수가 성 여인은 결혼생활에 실패했다. 첫 남자 이후에 네 남자를 다시 거쳤지만 안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어디서 만났는지 모르는 남자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찾아오셔서, 그 천한 여자의 영혼을 찾아오셔서 만나 주시는 이 보배로운 사랑에 모든 여성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여인들이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예수님이 여성을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미친 영혼 하나 건지기 위해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를 희생시키신 경우도 있다. 그만큼 주님은 영혼 하나를 귀중하게 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