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홍석기 목사 상리교회 범사회문제대책운동본부 사무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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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오스틴’이 쓴 ‘잘 되는 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오스틴의 친구가 ‘말기 암’에 걸렸다. 의사들이 다 포기했다. 하루는 집에서 요양을 하는데 4살 된 아들이 성경책을 들고 왔다. 글을 못 읽는 아이가 성경을 펼치고 손가락을 대며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여기에 뭐라고 써있는지 읽어줘~” 손가락이 요 11:4을 가리키고 있다. 아빠가 무심코 읽어주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읽는 순간 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어린 저의 아들이 죽음을 앞두고 절망에 빠진 저에게 성경을 펼쳐 손가락으로 이 구절을 가리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친구가 그때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확신했다. “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결국에는 그 친구가 고칠 수 없는 ‘말기 암’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똑같은 말씀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의미 없이 지나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능력’이 될 수 있다. “내가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교회에서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며 ‘2025년 내게 주시는 말씀’ 카드를 뽑았다. 이 말씀이 어떤 분들에게는 의미 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분들에게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 역시 “내가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필자는 시 32:6을 뽑았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이 말씀을 읽으며 ‘경건한 자’라는 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말씀의 전체 구조가 ‘경건한 자’에게 허락된 축복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 보통 ‘경건한 사람’하면 ‘깨끗한 양복을 입고, 머리는 포마드 기름을 발라서 쫙 넘긴 모습’이 떠오른다. 성직자가 입는 옷을 입고, 가슴에는 십자가를 달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기도 한다. 또는 목소리가 중저음의 동굴 목소리를 하고 한 손에는 성경책을 낀 목사를 떠올리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경건한 사람’을 떠올릴 때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종교적인 모습’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경건한 사람’은 이와 다르다. 먼저 ‘경건’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면, 헬라어로 경건을 ‘드레스케이아’라 한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경건을 이렇게 정의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주로서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감정이다.” 그에게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감’을 의미했다. 이렇게 볼 때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은 짧은 구절지만 ‘경건한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을 3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첫째, 경건한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하고 다음에 어떻다고 했나?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했다. 경건한 자의 특징이 있다. 주님을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님께 기도한다. 경건한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경외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도하게 되어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이하면 반드시 교제의 기쁨을 놓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만난다. 헤어질 때는 너무나 서운해서 떨어지기 싫어한다. 그러다가 사랑이 식으면, 만남이 줄어들고.. 사이가 틀어지면, 아예 만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다. 기도는 간구 이상의 의미가 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간구하기도 하지만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의 자리’를 좋아한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 하나님께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기도를 소중히 여긴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깊은 신뢰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주님을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경건한 자의 특징 두 번째는 ‘홍수’가 범람하는 일이 생겨난다. 시 32:6에 보면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하였다. 경건한 자에게 홍수가 범람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물’은 좋은 의미로 사용된다. ‘은혜, 축복, 부요,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 물이다. 물은 ‘정결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홍수는 다른 의미가 있다. 홍수는 ‘극심한 환란, 감당하기 어려운 핍박이나 대적’을 의미한다. 그런데 경건한 자에게 홍수가 범람한다고 하였다. 이 말씀의 뜻은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에게도 ‘극심한 환란, 감당하기 어려운 핍박이나 대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건한 성도에게는 환란도 어려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요 16:33)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을 잘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경건한 자들도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한다고 하셨다. 세상은 불완전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까지 세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불의한 자들이 잘 살고 거짓이 진리로 둔갑하고 경건한 성도가 가난과 질병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경건한 자들이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이렇게 말씀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어떻다고 했나? “박해를 받으리라.”했다. 다시 말해서 경건한 자에게 ‘홍수가 범람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이 부분이 은혜가 되었다. 속에서 담대함이 생겨났다. 만일 “너의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는 말씀이 주어졌으면 “할렐루야! 아멘!”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경건하게 살아가는데 ‘홍수가 범람한다’고 하였다. 이 말씀이 두려움이나 부담이 아니라 ‘기쁨’으로 와닿았다. 경건한 자에게는 박해가 따르는데.. 제가 경건한 자로 인정받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경건한 자의 특징 세 번째는 홍수에서 ‘보호받는 역사’가 나타난다.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했다.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 다음에 뭐라고 말씀했나?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했다. 홍수가 범람하면, 물에 휩쓸려 가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홍수가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그를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고후 4:9 “(경건한 자는)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하였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박해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박해가 있다. 그러나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그를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축복의 단비도 내리겠지만 홍수도 만나게 될 것이다. 시원한 순풍도 불겠지만 거센 풍랑도 일게 될 것이다. 때로는 내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그때도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다.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대신 싸우시며, 승리의 영광을 주실 것이다.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나를 치료해 주실 것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