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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기 목사 범사회문제대책운동본부 사무총장 (상리교회) |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다. “톨스토이의 작품 중 가장 예술적이고 완벽하며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인 이반이 “억울하다~”며 화를 내면서 죽는 것으로 끝난다. 죄수들이 사형을 당하며 죽을 때, 보통 이렇게 절규한다. “억울하다. 나는 정말 억울하다~” 그러나 이반의 경우는 다르다. ‘이반 일리치’는 정직한 남편이며, 자상한 아버지였다. 일평생 가족에게 헌신하며 살았다. 흐트러짐 없이 살았고, 성실하고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죽음이 다가온 시간에, 지나온 생애를 생각해 보니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의미 있는 시간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자 생의 마지막 순간에 분노를 발하며 죽었던 것이다. 필자는 신학생 시절이 이 책을 읽으며 “평생을 잘 살아오다가 왜 그랬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억울하다 할지라도 좀 참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 주변의 어떤 사람이 평생을 성실하게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다. 그런데 죽으면서 “이렇게 살아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어! 하고 싶은 일도 못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이렇게 죽게 되었으니.. 나는 억울하다~”하고 세상을 떠나면 어떻겠나? 주변 사람도 그렇겠지만 가족들이 민망할 것이다. 민망한 정도가 아니라 가족에게 상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장면을 떠올리면, 주인공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평생 열심히 달려왔는데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면 그렇게 절망하며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영생이 없는 사람들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이다. 죽음은 절망일 뿐이다. 그런데 자기를 돌보지 못하며 바쁘게 살고, 남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적으로 살다가 덜컥 죽게 된다. 그러면 얼마나 억울하겠나? 하지만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는 억울할 이유가 없다. 왜 그런가? 죽음으로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이 땅의 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파라다이스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아무리 수고하고 애쓰고 고생하고 보상을 받지 못해도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낱낱이 보상해주실 것이기에 억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천국에서 뿐만이 아니다. 이 땅에서도 받을 보상이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축복을 ‘누리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화평을 누리라고 하신다. 롬 5:1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어떻게 하라고 했나?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했다. 예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라는 거다. 이 화평은 죽은 다음에 천국에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며 누리는 화평이다. 많은 교인들이 죄 사함과 구원은 믿으면서 ‘화평’은 누리지 못한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화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화평을 누리지 못한다. 알면서 누리지 못한다. 어떻게 하여 우리가 화평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 꼭 필요한 자세가 있다. 자신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야! 나는 어쩔 수가 없어! 나는 어딜 가나 분쟁만 일으켜...”하면서 자신을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회개는 ‘영적인 정화’가 이루어지고 마음에 ‘평강’을 준다. 잘못을 했으면 상대방에게 찾아가서 “저의 잘못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하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회개하거나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용납 못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다가 우울증에 걸리고 심하면 자살까지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정죄에 관한 문제로 고민하던 중 고전 4:3,4에서 이렇게 말씀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고전은 고린도교회에 바울이 보낸 편지이다. 이때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었다. “바울은 말하는 게 시원치 않다느니.. 키는 작고, 머리는 대머리고, 외모가 별로라느니.. 사도의 자격이 없다느니..” 말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뭐라고 말하나? “내가 당신들이나 남들에게 판단을 받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신경을 안 쓴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중요한 말씀이 나오고 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은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다음에는 더 중요한 말씀이 이어지고 있다.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누구도 나를 심판할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이 나를 판단하며 심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하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그를 정죄할 수 없다.
하나님도 정죄하지 않으신다. 마귀는 감히 입을 벙긋하지도 못한다.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 그런데 유독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교인이 있다. 자기가 스스로를 정죄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내가 나를 용납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수십, 수백 번 달리셔도 소용이 없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화평을 누리려면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다. 나의 죄는 예수님이 다 도말하셨다. 누구도 나를 정죄할 수 없다. 나는 자유하다.” 자유인이 누리는 것이 화평이다. 롬 5:1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했다. 뒤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겠다. 1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했다. 그런데 그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 하였다. 우리가 누리는 화평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기에 우리가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 1절 맨 앞에 이렇게 말씀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우리를 ‘의롭게’ 하신 일이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이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있는 죄의 짐을 다 벗기셨다. 이제 우리를 속박하며 정죄할 세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화평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란다!
예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며, 평강의 왕이시다. 우리 인생에 아무리 거친 파도가 일어도 예수님께서 “잠잠하라~”하시면 잠잠해지는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화평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이같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며 사는 독자 여러분이 되시기 바란다!